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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Claude Monet] - 예술과 정원 사이

한아름 (40대공주~~) 2019. 1. 4. 11:19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와 함께 하는 정원 이야기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예술과 정원 사이

[Claude Monet ]

출생 - 사망



1840.11.1. ~ 1926.12.5.


1883년 마흔 세살의 나이로 장만한 클로드 모네의 집과 정원, 지베르니. 모네는 죽는 날까지 이곳에서 정원을 가꾸고, 그 정원의 풍경을 화폭에 담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정원사, 클로드 모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그가 살아 있을 당시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시간 남짓 떨어진 노르망디 지역에 위치한 지베르니(Giverny) 정원에는 그곳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끊이질 않았다. 모네의 이름 앞에는 ‘화가’라는 명칭이 늘 붙어 있지만, 그를 아는 당시 사람들은 모네를 ‘정원사’라 부르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모네는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정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선보이는 정원사였다.

클로드 모네가 처음 정원에 관심을 보인 것은, 풀과 나무 그리고 풍경을 마음껏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년에 결국 ‘식물의 색감을 화폭에 그려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로 그 어떤 색감으로도 식물의 아름다움을 대신할 길이 없음을 시인했다.


지베르니 정원의 탄생

그가 지베르니라는 곳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유명세를 타기 전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기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만약 큰돈을 번다면 이곳에 자신의 집을 짓겠노라 결심을 하곤 했다. 조급했던 모네는 아직 땅을 마련할 여력도 없이 무작정 그곳에 세를 얻어 살기 시작했고, 드디어 몇 해 지나지 않아 자신이 열망하던 농가주택을 구입했다.


지베르니 정원의 평면도. <출처: Fabrice Moireau, [Le Jardin de Claude Monet a Giverny], Gallimard, 2006.>


모네가 지베르니에 이렇게 욕심을 낸 건, 작지만 아름다운 지베르니 마을의 경관 때문이었다. 모네의 계획은 처음부터 건물보다는 정원의 완성에 있었다. 처음에는 위 그림에서 보이는 하단 부분의 땅과 정원만을 소유했지만, 후에는 길 건너편의 땅까지 구입해 그곳에 거대한 연못을 조성하고 거기에 다리를 놓아 새로운 정원을 만들었다. 이 도로 건너편의 땅이 훗날 모네의 대표작으로 언급되는 19폭 짜리 대형 그림, <수련(Water lily)>의 배경이 된 곳이다.



시시각각 빛에 의해 변화하는, 찰나의 순간을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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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흰색 수련 연못>1899년, 캔버스에 유채, 89 x 93cm, 푸슈킨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클로드 모네, <화가의 지베르니 정원>1900년, 캔버스에 유채, 81 x 92cm, 오르세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클로드 모네, <정원 길>1902년, 캔버스에 유채, 92 x 89cm, 오스트리아 미술관 소장. <출처: 네이버 미술검색>작품 보러가기

“색은 하루 종일 나를 집착하게 하고, 즐겁게 하고, 그리고 고통스럽게 한다.”


모네가 한 이 말이야말로 그의 그림과 정원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될 듯하다. 모네뿐만 아니라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을 그리는 사람들이었다. 이전의 화풍이 대부분 실내 공간에서 정지돼 있는 사물을 그리는 정물화나 혹은 신화, 종교화에 머물렀다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야외용 이젤과 물감, 캔버스를 들고 밖으로 나섰다. 실내 공간 속, 구상된 조명에 의해 만들어낸 빛과 자연의 빛은 분명 달랐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아침 해가 떠오르고 다시 지는 그 순간까지 시시각각 빛에 의해 세상의 색이 달라지고 있음에 집중했고, 그 찰나의 색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모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네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그 빛을 잡기 위해, 시시각각 너무 빠르게 달라져서 놓칠 수 있는 그 순간의 색상을 잡기 위해, 정원이라는 공간을 생각했다. 정원에서라면 그는 언제든 자신의 원하는 색감을 잡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가든 디자인 노하우

“내가 유일하게 잘 하는 두 가지는 그림 그리는 일과 정원 일이다.”

모네의 이 말은 그에게 그림 그리는 일과 정원 일이 한 가지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모네는 종종 자신이 정원 일에는 재능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하루 종일 정원에서 소매 없는 옷을 입고 구리빛으로 그을린 팔로 땅을 뒤집고, 식물을 심었다. 장기 출장길에 오를 때 정원사에게 남겼다는 다음의 메시지는 그가 얼마나 정원 일에 해박한 지식과 열정이 가득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대략 300 화분 정도의 양귀비꽃과 60 화분 정도의 스위트피 씨를 뿌려주시고, 화분에 블루 세이지와 파란색 수련을 심어주세요. 그리고 이미 다 자란 달리아와 수련은 이제 심어주시고요. 달리아는 심은 지 보름쯤 됐을 때 새잎이 막 올라오면 그걸 잘라서 온실에서 다시 재배시켜주세요. 아 참, 그리고 백합 구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인 작업 지시를 할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전문 정원사의 수준을 이미 넘어서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원사 클로드 모네가 디자인한 정원은 어떤 모습일까?



1. 중심 색상과 강조 색상의 대비를 통해 감각적인 연출을!


지베르니 정원의 한 부분. 노란색으로 대부분을 채운 뒤, 그 안에 빨강과 주황색의 포인트를 더해 감각적인 보색 대비를 선보이고 있다.


모네는 자신의 그림에서나 정원에서나 색에 대한 집착과 열정이 가득했다. 모네가 지베르니 정원에서 중점적으로 구사한 식물 디자인 방식은 ‘무리 지은 덩어리’ 기법이다. 그는 수십 개의 색상을 마구 섞는 것이 아니라, 베이스가 되는 중심 색상으로 거의 80퍼센트 이상을 채우고 그 바탕 위에 보색의 대비가 되거나 혹은 강조가 되는 색상을 포인트로 채우는 방식을 많이 썼다. 모네의 이런 방식은 그가 남긴 메모 속에도 잘 나타나 있다.

‘모노톤의 색감을 하나의 덩어리로 심으면 강조의 효과가 뛰어나다. 여기에 보색의 색감을 교차시키며 섞어주면 감각적인 연출이 가능해진다.’



2. 꽃의 시간을 디자인하다


분홍의 느낌으로 통일된 화단. 화단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달리아, 글라디올러스, 고우라, 크로코스미아 등 여름에 꽃을 피우는 식물들이 다양하게 심겨져 있다. 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는 시간까지 고려한 세심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클로드 모네는 생의 대부분 동안 실내 공간이 아닌 밖에서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식물이 사계절 동안 어떻게 변화되는지를, 특히 그 색감의 변화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봄에 심어놓은 수선화와 튤립은 여름이 되면 당연히 꽃이 지고 시들어 정원에 생기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런 단점을 막기 위해 그는 꽃의 시간을 철저하게 계산했고, 그것을 디자인에 반영했다.


예를 들면 봄에 피는 식물 옆에 여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을 심고, 그 뒷편에 가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을 심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모네는 같은 수선화라고 해도 수종에 따라 피는 시기가 조금씩 다르다는 점, 같은 달리아라고 해도 언제 심어주었느냐에 따라 꽃을 피우는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해, 2주 간격으로 식물을 심어 그 지속성이 봄부터 여름까지 한결같도록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시간의 계산을 계절적으로만 했던 것이 아니라, 하루 동안에도 아침에 꽃을 피우는 식물, 아침 이슬을 맞으면 더 아름다울 수 있는 식물, 저녁 햇살에 색감이 더 화려한 식물 등 하루의 시간표에 따른 식물 구성까지도 생각해 정원을 디자인했다는 점이다.



3. 다양한 색과 수종의 개발


모네의 정원에서 다양하게 시도된 팬지(pansy)의 수종. <출처: Fabrice Moireau, [Le Jardin de Claude Monet a Giverny], Gallimard, 2006.>


모네의 색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다. 그는 식물이 다른 종과 서로 만났을 때 예상치 않았던 돌연변이가 탄생하고, 이로 인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색감의 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모네와 그의 정원사 팀의 노력은 기존의 식물을 사와 심는 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접목’이라는 상당히 전문적인 원예기법을 이용해 다른 식물을 접붙여 새로운 수종을 만드는 일도 모네의 정원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모네는 이런 작업을 통해 기존의 식물 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색감, 새로운 모양의 식물을 만들어내는 일에 큰 보람을 느꼈다. 이로 인해 그의 정원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단순한 식물의 배열이 아니라 진하기와 연하기, 어둡기와 밝기 등 같은 색감이지만 수 백가지의 다른 색이 혼합돼 있는 광경이 연출되곤 했다. 물론 모네는 이런 정원의 느낌을 매일매일 그의 화폭에 담아냈다.



4. 높낮이를 디자인에 반영하여 단조로움을 피할 것


바닥에 무리지어 심어진 한련화와 그 위를 장식한 아치의 모습. 모네의 정원은 모네가 죽은 후 훼손이 심각해지다 1980년에 이르러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이 되었다. 모네 시절에는 이곳 장미덩굴이 촘촘히 아치를 뒤덮어 분홍색과 빨강색의 장미꽃을 화려하게 피웠다. 한련화의 색상이 마치 쌍둥이처럼 아치 위에서도 펼쳐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모네가 좋아했던 식물은 대부분 화려한 색감을 자랑하는 일년생 초본식물이거나 혹은 다년생 초본식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초본식물의 특징은 키가 아무리 커도 1미터 미만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이들 초본식물로만 구성된 정원은 아무리 화려해도 식물 전체가 마치 카펫이 갈린 것처럼 아래로만 펼쳐져 있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런 수평적인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모네는 덩굴식물을 많이 이용했다. 아치, 퍼고라, 지지대 등으로 일정한 구조를 만든 후에 그 위에 화려한 꽃을 피우는 덩굴장미, 등나무 등을 올려 밑으로만 집중되어 있는 색감이 위로도 이어질 수 있도록 시선을 끌어올린 것이다.



5. 동양 정원으로부터의 영향


모네는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동양 문화, 특히 일본 문화에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직접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고, 또 일본의 판화와 그림을 통해 동양의 문화를 터득하면서 정원에도 동양의 정서를 반영하기 위해 애를 썼다.

지베르니 정원의 도로 건너편에 조성된 연못을 끼고 있는 정원은 한눈에 봐도 일본 정원의 느낌이 완연하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나무, 철쭉과의 식물Rhodendron, 작약과 식물Peony, 등나무, 벚나무, 버드나무, 단풍나무 등 이곳을 채우고 있는 수종만 보아도 정확하게 우리의 식생과 일치한다. 사실 모네는 타고난 화가로서 정원 디자인에 대한 부분을 특별히 배우지 않았지만, 정확하게 동양 정원의 디자인적 특징을 잡아내 지베르니 정원에 도입했다.



1) 주변 경관의 활용


길 건너의 정원. 지하 차도를 건너면 또 다른 모네의 정원이 등장한다. 입구에 촘촘히 대나무를 심어 정원 안쪽의 모습을 단단히 은폐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


지베르니는 강을 끼고 형성된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에 정원을 만든 모네는 주변을 흐르는 물길을 가져다 아주 자연스럽게 방향을 살짝 틀어 자신의 땅으로 들어오게 한 뒤, 연못에 잠시 머물렀다 다시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우리의 전통 정원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을 그대로 적용한 것으로, 주변 경관을 빌려오는 동양 정원의 특색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2) 막고 틔우고 구불거리고


멀리 모네의 초록색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는 서로 마주 보고 있어서 어느 쪽에 있어도 사진을 찍으면 비슷한 풍경을 연출한다. 다리 위를 덮고 있는 퍼고라에는 등나무가 가득차 있고, 그 옆으로 거대한 버드나무가 잎을 떨어뜨리고 있다. 모든 나무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수종들이며, 연못과 다리의 배치 등이 일본 정원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서양 정원과 동양 정원의 가장 확연하게 다른 점 중 하나는 공간의 배치 감각이다. 서양의 정원은 주로 전망용으로, 건물의 높은 곳에서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풍경 연출, 혹은 한자리에 서서 멀리 수평선 지점까지 이어지는 축의 힘을 보는 것이 큰 특징이다. 반면 동양의 정원은 보이지 않게 입구를 막아 작은 문을 열어주고, 그러다 다시 너른 공간이 나타나지만 담장으로 시선을 살짝 감추며, 길은 직선이 아니라 구불거려 가까이 있는 듯 하지만 결코 쉽게 다가갈 수 없게 하는 복합성을 띠고 있다. 모네는 후에 만든 길 건너편의 정원에서 이런 동양 정원의 디자인적 특징을 자신만의 미적 감각으로 재해석, 아주 아름답게 연출해놓았다.

“정원은 나의 최고 명작” 

모네의 집에서 내려다 본 풍경. 그의 정원은 내려다보는 곳이 아니라 꽃 하나하나를 무릎을 굽혀 관찰하는 정원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원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명작이다.” 모네 스스로가 한 말이다. 그는 화가로서 평생을 살아왔지만 말년에 결국 자신의 최고 명작을 그림에서 뽑지 않고 정원이라고 말했다. 그가 남긴 말 중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사람들은 내 그림에 대해 토론하고, 마치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해 내 그림을 이해하는 척 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필요한 것은 그냥 사랑해주는 것이다.”

이 말 속에는 그가 만든 정원도 분명히 포함이 된다. 필자 역시도 그의 정원을 두고 식물의 디자인적 관점에서 논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사랑이다. 얼마나 정원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 그것이 우리가 정원을 만드는 목적이고, 모네가 꿈꿨던 정원의 세계였다고 믿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Claude Monet] - 예술과 정원 사이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와 함께 하는 정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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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규방칠우
글쓴이 : 혜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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