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와 함께 하는 정원 이야기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그레이트 딕스터 가든
정원은 정원사의 창조적 공간이다
[Christopher Lloyd ]
출생 - 사망 | 1921.3.2. ~ 2006.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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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위대한 가든 디자이너
크리스포터 로이드가 만든 너서리(nursery)의 모습. 너서리는 식물 혹은 원예용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정원 문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는 영국에서는 각각의 정원이 이 너서리의 판매 수익과 정원 입장료를 바탕으로 수익을 만들어낸다.
2006년 크리스토퍼 로이드(Christopher Lloyd, 1921~2006)가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을 때, 영국언론은 21세기의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던 정원사가 사라졌다는 표현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크리스토퍼 로이드는 정원사와 가든 디자이너의 영역을 통합적으로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번도 자신을 가든 디자이너로 칭하지 않았지만, 그의 풍성한 식물 연출은 식물 디자인의 교과서로 여겨질 정도로 다양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해왔던 개척자였다.
정원사를 꿈꾸던 소년
데이지 로이드가 개발한 메도우 가든. 크리스토퍼의 어머니 데이지는 원예에 대한 기술이 대단했고 정원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데이지는 마치 초원을 연상시키는 풀과 꽃이 가득한 정원을 꿈꾸었고, 이것을 크리스토퍼가 이어받아 자연스러운 초원의 과수원으로 완성시켰다.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아버지 나다니엘 로이드는 당시 영국에서 불고 있던 아트 앤 크래프트 운동(19세기 말~20세기 초 영국에서 있었던 공예, 장인정신을 되살리자는 문화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으로, 포스터 디자이너였다. 그는 동지이자 지인이었던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Edwin Lutyens, 가든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 편 참조)과 절친한 사이었고, 훗날 자신이 구입한 15세기 가옥의 확장과 수리를 에드윈에게 맡기기도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아버지 나다니엘과 그의 부인 데이지 사이에서 여섯 번째 아이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난 크리스토퍼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성향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정원에 대한 열정을 물려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 데이지였다. ‘그레이트 딕스터(Great Dixter)’라고 이름 붙여진, 에드윈 루티엔스가 개조한 집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퍼는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정원 일을 터득했고, 그것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겨 훗날 전업 정원사로 일하는 데 커다란 밑거름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원에 대한 열정을 뒤로 하고 명문 사립고등학교인 럭비 스쿨(Rugby School)에 다닐 만큼 그는 집안의 대단한 후원을 받고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영국 최고의 명문 대학인 케임브리지 대학, 킹스 칼리지에 입학,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공부하게 되지만 그의 대학 시절은 세계대전 참전으로 일시 중단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장래 희망은 정원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지만 주변의 만류로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그는 전쟁을 치르면서 점점 더 세상에 대한 회의가 깊어짐과 동시에 정원에 대한 열정이 되살아남을 느낀다. 결국 전쟁이 끝난 뒤, 크리스토퍼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나와 런던 대학에서 ‘관상 원예학(Decorative Horticulture)’으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4년 간 강사로 일했다. 그리고 강사 일을 그만둔 채 그레이트 딕스터로 돌아가 평생을 전업 정원사로서 살게 된다.
공부하는 정원사의 삶을 개척하다
에드윈 루티엔스의 상징과도 같은 반달형 계단. 크리스토퍼 로이드는 그 위에 붉은 양귀비꽃을 심어 강렬함을 더했다.
크리스토퍼가 전업 정원사의 삶을 결심했을 때 주변의 모든 지인들은 그를 말렸다고 한다. 정원 문화가 발달한 영국이라고 해도 정원사의 직업적 위치가 그리 높지 않았던 탓에 화려한 학벌을 뒤로 하고 전업정원사로서의 삶을 살려는 그를 말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가 식물을 키우는 농장인 너서리(nursery)를 열고 정원사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을 알렸다.
이후 그는 평생 동안 오직 정원사로서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을 지니고 살았다. 특히 그는 ‘공부하는 정원사’라는 입지를 탄탄히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단순히 경험의 축적으로 정원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식물과 흙, 과학에 대해 공부함으로써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식물의 재배에 수없이 도전했고, 수많은 실험적 원예기법을 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생전에 총 7권의 책을 출판했고, 각종 신문과 잡지에 정원 관련 글을 평생 동안 연재했다. 특히 그는 단순히 식물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나 원예의 노하우만을 전달했던 것이 아니라, 인간과 정원, 인간과 식물에 대한 철학적이면서 깊은 내면의 성찰을 담아 정원 글쓰기의 새로운 분야를 구축한 문인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크리스토퍼 로이드는 아내와 자식을 두지 않고 독신으로 삶을 마감했지만 수많은 지인들과 후배, 제자들을 양성하는 기쁨을 누렸다. 더불어 그는 정원을 가꾸는 데에만 그 의미를 두지 않고, 지인들을 초대해 음식을 베풀고 정원을 즐기는 일에도 남다른 애정을 쏟아, 정원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을 만끽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조화, 그레이트 딕스터 정원
그레이트 딕스터는 정원뿐 아니라 시공간을 뛰어넘는 15세기와 16세기 건축 양식의 혼합으로도 큰 관심을 얻고 있다. 크리스토퍼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청년 시절 잠시 이곳을 떠났다 다시 돌아와 2006년까지 여기에서 정원을 돌보며 평생을 살았다.
크리스토퍼 로이드를 언급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그레이트 딕스터다. 그레이트 딕스터는 정원뿐만 아니라 건물 자체로도 현재까지 그 가치를 크게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그레이트 딕스터는 아버지 나다니엘 로이드가 1910년에 구입한 것으로, 15세기에 건축된 오래된 가옥이 있던 터였다. 그는 이 오래되고 낡은 집을 그대로 살리면서 여기에 당시 켄트 지역에 남아 있던 16세기 건물을 뜯어와 확장을 시도했다. 이 확장 공사의 책임자로 지인이었던 에드윈 루티엔스가 임명되었고, 나다니엘은 에드윈과 함께 15세기의 오래된 부분을 살리면서도 16세기의 전혀 다른 양식을 혼합시키는 독특한 방식으로 그레이트 딕스터를 완성해갔다.
정원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전체 구성은 에드윈 루티엔스가 맡았고, 훗날 크리스토퍼가 물려받았을 때도 그 원형은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이어졌다. 다만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크리스토퍼는 에드윈의 디자인을 살리되, 거기에 식물의 디자인을 크게 바꾸는 등의 시도로 자신만의 색깔을 찾았다.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식물 디자인 노하우
크리스토퍼는 언젠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원을 디자인할 자신은 없다. 나는 단지 식물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또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그의 말처럼 그는 정원을 디자인하기보다는 정원의 식물이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잘 살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연구했던 정원사이자 디자이너였다.
1. 식물의 구성은 최대한 풍성하게
크리스토퍼는 지상의 화단에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식물을 심어 화단을 풍성하게 연출하는 것을 좋아했다.
크리스토퍼는 다른 가든 디자이너들에 비해 식물을 풍성하게 쓰는 것을 좋아했다.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식물을 심어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그의 디자인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특히 에드윈 루티엔스의 디자인을 걷어내고 처음으로 자신만의 느낌으로 만든 롱 보더(long border)는 그가 얼마나 빽빽한 식물심기를 즐겼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식물을 이렇게 빽빽하게 심었을 때의 가장 큰 단점은 영양분을 두고 식물들이 서로 다투면서 전체적으로 빈약해질 수 있다는 것인데, 이를 막기 휘해 크리스토퍼는 해마다 엄청난 양의 퇴비와 거름을 화단에 투입해 영양분 공급이 빈약해지는 것을 막았다.
2. 강렬한 원색과 볼륨감으로 굵고 진하게!
100미터에 이르는 길쭉한 화단에 흙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선 식물들. 크리스토퍼는 잔잔한 파스텔 톤이나 단색의 식물보다는 원색의 색감과 굵고 볼륨있는 꽃과 잎을 지닌 식물을 선호했다. 루핀의 노랑과 빨강, 멀리 보이는 알리륨의 둥근 보라빛, 그리고 갈대와 관목 등이 선 굵은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크리스토퍼는 화단의 디자인에 있어 파스텔 톤의 잔잔함을 강조하던 방식을 싫어했다. 그는 정원의 모든 꽃과 잎이 자신만의 원색 느낌 그대로 살아나기를 바랐고, 전체적 어우러짐보다 식물 하나하나가 각자 소리를 지르듯 굵고, 진하게 떠들어주기를 원했다. 덕분에 크리스토퍼식 식물 디자인은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복잡하고 화려하게 연출되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함이 어지럽지 않고 마치 각각의 보석이 빛을 내는데 그것 자체가 극도로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디자인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식물에 대한 지식에 앞서 예술적 감각이 뛰어났던 크리스토퍼의 특별한 색채 감각 덕분이었다. 그는 마치 후기 인상주의 화가인 고흐나 모네가 그려낸 그림처럼 쉽게 어울릴수 없는 강한 원색들을 과감하게 혼합해 쓰면서 그 안에서 훌륭한 조화를 찾아낼 수 있도록 화단을 구성했다.
3. 정해진 틀 속의 자유로움
그레이트 딕스터 정원의 ‘8각 정원(Octagonal Pool)’. 1910년 에드윈 루티엔스는 밑으로 꺼지는 8각형의 정원을 만들었다. 자칫 지나치게 규격화된 형태로 인해 단조로울 수 있는 이 공간에 크리스토퍼는 식물이 자유롭게 자라도록 안배해 딱딱함과 자유로움이 조화를 이루도록 만들었다.
크리스토퍼의 디자인은 경계선 없이 흐드러지게 넘나드는 식물들이 특징이기도 하다. 특정한 디자인의 틀을 잡거나 식물 자체에 어떤 모양을 주려고 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란 식물이 다른 식물을 덥치기도 하고 넘어서기도 한다. 그가 이렇듯 식물의 자유로움을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에드윈 루티엔스가 그려놓은 정형화된 구획 정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토퍼는 루티엔스가 만들어놓은 기하학적 모양의 틀, 혹은 규칙성을 지닌 형태 속에 지나칠 정도로 자유롭게 식물을 심어 조화를 맞추는 데 주력했다.
이런 디자인 노하우는 이미 거트루드 지킬을 통해서 시도되었던 것으로, 크리스토퍼는 여기에 좀 더 남성적이면서도 거친 느낌의 자유로움을 더했다. 그런데, 이 디자인의 핵심은 절대적으로 균형 감각에 있다. 만약 에드윈 식의 딱딱한 디자인이 없었다면 크리스토퍼의 과감하고 자유로운 식물 디자인은 자칫 지저분함으로 끝날 수 있었을 것이다.
4. 고유한 멋을 배가시키는 혼합의 매력
키가 큰 나무, 키가 작은 관목, 초본식물에 일년생 초화식물까지 혼합 식재로 구성된 정원. 크리스토퍼는 색채와 형태만으로 식물을 혼합한 것이 아니라, 식물의 성장 주기를 따지지 않는 다양한 연출로 1년 사계절에 대한 안배를 잊지 않았다.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나는 재료(식물)를 섞어쓰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 그것은 마치 물감을 섞어서 쓰는 것과 비슷하다. 각각의 재료들은 고유의 멋을 가지고 있고, 그 멋들이 만나 다양함을 만들어낸다”.
그의 말처럼 그레이트 딕스터에서는 단색이나 혹은 파스텔 톤의 잔잔함과 고요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그가 개발한 혼합 식재(Mixing planting)는 화단에 키가 큰 나무, 키가 작은 관목식물, 다년생 초화식물, 그리고 일년생 식물까지 모두 한꺼번에 혼합을 시키는 기법으로, 화단 자체가 엄청난 화려함을 갖게 된다. 이 혼합 식재 화단의 가장 큰 장점은 초본식물로만 구성된 화단에서 겨울이 되면 모든 식물이 잎을 떨구어 허전해지는 단점을 보안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가장 큰 단점을 꼽으라면 끊임없이 정원사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일년생 식물은 해마다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식물을 공급해주어야 하고, 초본식물의 경우도 자리를 옮겨주거나 분갈이를 해주는 등의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5. 전통은 남겨둘 것
유럽의 정원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토피어리. 토피어리는 식물을 특정한 모양에 따라 깎고 다듬어 정원에 진열하는 것으로, 유럽에서는 이 토피어리의 모양이 현란할수록 정원의 가치를 높게 보았다.
크리스토퍼는 개인적으로 유럽의 전통 정원 양식 가운데 하나인 토피어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토피어리는 주목(Taxus), 회양목(Boxus), 쥐똥나무(Ligustrum), 측백나무(Juniperus) 등의 나무를 동물 혹은 기하학적 문양으로 모양내 잘라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이 토피어리를 제거하지는 않았다. 싫던 좋던 자신의 기호와 상관없이 전통으로 남아 있는 부분은 보존되어야 한다는 영국 특유의 문화 존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날카롭게 날을 세워 모양을 잡던 토피어리를 조금은 자유롭게 삐져나갈 수 있도록 모양을 잡는 방식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재구성했다. 이렇게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다른 문화뿐만 아니라 정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지금 자신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애버린다면, 문화와 전통은 결국 끊기게 되고 훗날에는 그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6. 특별한 매력을 찾아라
크리스토퍼가 조성한 열대식물 정원. 사진은 아직은 미완의 모습으로, 이 정원은 2006년 크리스토퍼가 죽은 뒤 이곳의 헤드 가드너 퍼구스 가렛에 의해 2007년 완성이 되었고, [Exotics garden]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함께 출판되었다.
바나나 나무가 저절로 무성하게 자라는 열대지방에서 바나나를 정원의 아이템으로 가져오는 일은 특별할 것이 없다. 하지만 바나나가 자랄 수 없는, 겨울 추위가 매서운 온대지방에서 바나나를 키울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기쁨과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크리스토퍼는 어떤 정원사보다 다양한 실험과 시도를 해왔던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된 장미 정원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열대식물 화단(Exotic bed)’을 만들기 시작했다. 여름 기온이 25도에 머물고 햇볕조차 구름을 잘 벗어나지 못하는 영국에서는 온실이 아닌 바깥 화단에서 열대식물을 키운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조건을 이겨내고 열대식물로 구성된 화단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식물들이 이런 열악한 조건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했다. 늦게 싹을 틔우는 탓에 이 화단은 6월부터 9월까지가 절정이다. 화단에는 영국에서 보기 힘든 열대의 식물, 달리아(Dahlias), 바나나 나무(Musa basjoo), 칸나(Canna), 아주까리(Ricinus)가 구성돼 그 화려함과 선 굵은 볼륨을 보여준다.
관리가 수월한 정원은 정원이 아니다
크리스토퍼의 정원과 원예에 대한 철학은 한결같았다. 그는 “관리하기에 수월하면서 보기에도 좋은 사계절 정원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에 언제나 “그런 정원은 없습니다.”로 못을 박았다. 그는 아름다운 정원은 그만큼 정원사의 끊임없는 손길과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고 단언했다. 다만 그는 정원에서의 노동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쁨을 선사하는지를 느껴볼 것을 주문했다.
죽기 얼마 전까지도 그는 가장 아끼는 후배이자 동료였던 헤드 가드너 퍼구스 가렛과 함께 그레이트 딕스터의 미래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자손이 없는 그는 재단을 만들어 그레이트 딕스터 전체를 기증했고, 20년 가까이 일해온 퍼구스 가렛을 중심으로 그레이트 딕스터가 미래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원예의 메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법률적 장치를 마련해두었다.
크리스토퍼 로이드를 단순히 원예의 기술을 전파하고,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영양력 있는 정원사로 평가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평생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 그래서 참 아름답게 닮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네이버 지식백과] 크리스토퍼 로이드의 그레이트 딕스터 가든 [Christopher Lloyd] - 정원은 정원사의 창조적 공간이다 (가든 디자이너 오경아와 함께 하는 정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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