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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 말을 걸다 ① 이런 노년이면 안분지족인 것을…
매화꽃 흩날리자 거문고 든 벗이 찾아왔다
▲ 전기의 ‘매화서옥도’ 19세기 중엽, 종이에 엷은 색, 32.4×36.1㎝ 국립중앙박물관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면(有朋自遠方來)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不亦樂乎)?’ 중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특별히 한문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나 이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해석과 함께 ‘학이시습지…’라는 원문을. 예전에는 첫 번째 문장이 최고인 줄 알았다. 그런데 점점 나이 들어가면서 두 번째 문장의 진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는 것은 기쁜 일이다. 더하여 혼자 느끼는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벗이 있다면 더욱 기쁘고 즐거울 것이다. 책을 읽다 온몸이 전율하듯 멋진 문장을 발견했을 때 친한 벗에게 전화해서 자랑하고 싶었던 순간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했을 것이다. 눈이 소복이 쌓인 날, 매화꽃이 눈꽃처럼 휘날린다. 이런 날은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감히 매화꽃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된다. 출렁거리는 마음을 무시한 채 책만 읽을 정도로 무례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무시해도 좋다. 이 정도 외도로 자책한대서야 어디 각박해서 살 수 있겠는가. 떠밀리며 살아온 시간을 내려놓고 잠시라도 꽃을 향해 외도를 해볼 수 있는 사람만이 남은 길을 싱싱하게 떠날 수 있다. 피리 소리와 꽃잎의 춤사위에 서늘한 슬픔이 따뜻해진다. 파렴치한 외로움은 허물어지고 참혹했던 그리움마저 슬그머니 빗장을 푼다. 친구의 마음이 전해진 걸까. 거문고를 어깨에 메고 다리를 건너는 선비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빨리 가서 피리 소리에 맞춰 거문고를 뜯기 위함이다. 백아와 종자기가 아니라도 오랜 세월 마음을 나누다보면 누구나 지음(知音)이 된다. 지음은 굳이 연인이 아니라도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사이다. 그러고 보니 서재 안의 선비가 창문을 열어 두었던 까닭이 꼭 매화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오늘 찾아오기로 한 지음이 어디쯤 오고 있을까, 기다리고 있음이렸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 연두색이라면 달려가는 사람의 마음은 붉은색이다. 눈 덮인 산과 언덕 곳곳에 봄의 발자국처럼 찍혀 있는 연두색은 아침부터 창문 열고 친구를 기다린 사람의 마음이다. 이 그림은 오경석보다 6살 많은 전기가 친분이 두터웠던 오경석을 위해 그려준 것으로 이들 모두 조희룡(趙熙龍·1797~1859)이 만든 문학동인 ‘벽오사(碧梧社)’의 회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중인으로 전문화가는 아니었다. 전기는 약재상이었고, 오경석은 역관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모두 그림으로 기억한다. 직업은 잊혀지기 쉬워도 예술작품은 오래 그 여운이 남는 법이다. 그렇게 시작된 매화 예찬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마음을 흔들더니 급기야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에게서 절정에 도달한다. 매화를 극진히 사랑하여 매화 시 100여수를 남긴 퇴계 선생이 마지막 눈을 감을 때 남긴 유언이 ‘매화에 물을 주라’였다. 사람들은 눈 속에 피어나는 설중매(雪中梅)를 보며 자신이 현재 겪고 있는 시련을 극복할 수 있었다. 때로 시련이 인생의 품위를 무참하게 떨어뜨려도 지조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다시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얻었다. 나는 누가 살짝만 건드려도 칼날같이 예리해지는데 맹추위를 밀쳐내는 무기라는 것이 기껏 연약한 꽃잎이라니. 살짝 부끄러울 때도 있다. 부끄러운 내가 나 혼자의 몫으로 추위를 외로워할 때, 거문고 들고 찾아오는 친구는 나눔과 위로다. 추위를 함께 견뎌줄 수 있는 동지이자 반려자다. 거친 밥에 야채만 먹는 노년이라도 이 정도 삶이라면 안분지족이다. 내 맘 알고 네 맘 알 수 있으니 외로울 일 없고 고독하게 죽어갈 일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준비할 것은 돈보다도 거문고 들고 올 친구를 만드는 일이다. 아니, 내가 피리를 불며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찾아오고 싶은 그런 친구가 되는 것이다. ‘매화서옥도’를 보며 꿈꿔 본 은퇴 후 모습이다.
동양화가 말을 걸다 ② 히시다 ?소 ‘왕소군’
봄은 왔는데 봄 같지가 않구나
▲ 히시다 ?소 ‘왕소군’ 1902년, 비단에 채색, 168× 370㎝, 일본 산형 선보사 소장
매화꽃이 피었다. 산수유도 피었고 개나리·진달래도 피고 있다. 이제 복숭아꽃·살구꽃이 당도할 테고 벚꽃과 이팝나무까지 개화(開花)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면, 비로소 봄은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낙화(落花)하게 될 것이다. 아무려나 지금은 봄의 시작일 뿐. 꽃이 피고 새가 울어도 부드러운 봄바람 속에는 아직도 지난 겨울의 찬 여운이 은밀하다. 거칠게 타오를 수도 절망할 수도 없는 시간. 봄은 봄인데 봄을 희망하기에는 꽃의 맹세가 너무 허약하다. 봄비 한번 내리면 후두두둑 떨어져 버릴 무서운 생존 앞에서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뜨거운 열매를 맺겠다는 산수유의 약속은, 증거를 들이대기 전에는 믿지 못하는 현실주의자들에게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추상에 의지하여 생을 헤쳐 나가야만 하는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로다.” 가슴속에 응어리가 맺혀 좀처럼 풀리지 않을 때도 역시 한마디한다. “춘래불사춘이로다.” 사랑하는 정인(情人)한테 소식이 없을 때도, 정치인이 낙선해서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있을 때도 춘래불사춘이다. 뭔가 세상사가 마뜩잖으면 계절에 상관없이 무조건 춘래불사춘이다. 왕소군(王昭君)이다. 왕소군은 서시,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사람이다. 많은 화가들이 아름다운 왕소군의 초상화를 다투어 그렸는데 히시다 ?소(菱田春草·1874~1911)의 ‘왕소군’도 그중의 하나다. 감상자의 눈길을 여인들에게만 향하게 하려는 듯 배경은 흐릿하고 몽롱하다. 실물대 크기의 여인들이 무더기로 서 있는 작품 앞에서 감상자는 깃털같이 가벼운 옷자락 소리를 들었음 직하다. 파스텔톤으로 차려입은 여인들은 한결같이 곱고 우아한데 자세히 보니 이들 모두 비탄에 빠져 있다. 고운 여인의 슬픔이라니. 무슨 일일까. 그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썰렁한 방에서 날마다 외로운 시간을 보내며 울적하게 살았다. 그런 어느 날 한나라에 큰 위협이 되던 흉노의 왕이 한나라 공주나 후궁에게 장가를 들고 싶다고 전해왔다. 두 나라 간의 화친을 원했던 황제는 흔쾌히 승낙했다. 연회가 베풀어졌다. 황제한테 버림받은 궁녀들이 연회장에 나왔다. 그중에는 왕소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왕소군을 본 흉노의 왕이 단박에 그녀를 지목했다. 흉노의 왕이 왕소군의 손을 잡고 황제 앞에 섰을 때 황제는 지상에 유배온 하늘의 선녀를 보는 듯했다. 일찍이 선녀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무심함에 가슴을 쳤지만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황제는 애꿎은 화공의 목을 치라는 명령으로 그 아쉬움을 달랬다. ‘소군출한(昭君出寒)’ 혹은 ‘명비출새도(明妃出塞圖)’라는 제목이 붙은 일련의 그림들은 말을 탄 여인이 비파를 들고 있는 캐릭터가 특징적이다. ‘봄은 왔는데 봄 같지가 않구나’로 시작하는 왕소군의 노래는 어찌나 애절하고 사무쳤던지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그 노래에 심취하여 날갯짓을 잊고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낙안(落雁)’은 미인의 대명사가 되었다. 자신의 운명을 어쩌지 못하는 자의 처연함이 담긴 ‘춘래불사춘’은 원래 당나라 때의 시인 동방규(東方叫·측천무후 때 활동)가 왕소군을 생각하며 지은 시의 한 구절이다. 그 표현이 너무나 정확하여 마치 당사자가 부른 노래처럼 와전되었고, 시인의 이름은 왕소군의 미모에 묻혀 잊혀지게 되었다. 왕소군의 운명을 안타까워하기는 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태백, 구양수, 왕안석, 황정견 등 기라성 같은 시인들이 입을 모아 그녀에게 찾아오지 않은 봄을 아쉬워했다. 지금도 여전히 시가, 소설, 희곡 등 다양한 문학작품 속에서 왕소군의 봄을 찾아주자는 동정론이 꾸준히 힘을 얻고 있다. 여인들이 모두 갑을을 다툴 만큼 아름답다 보니 누가 왕소군인지 가늠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발표했던 당시에도 논란이 분분했다. 과연 누가 왕소군일까. 찾아보시기 바란다. 그렇다. 봄은 그렇게 올 것이다. 봄은 왔으되 봄 같지 않다고 미심쩍어 하는 순간에도 봄은 오고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오고 있다.
/ 주간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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