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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양화가 말을 걸다 ⑤⑥

한아름 (40대공주~~) 2018. 12. 6.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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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화가 말을 걸다 ⑤ 안견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에는 안평 대군 죽음이 예언돼 있다

     

     

    ▲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두루마리, 비단에 연한 색, 38.7×106.5㎝, 일본 텐리대학 도서관

     

     

    “그대가 내 꿈을 그려줘야겠어.”
       
    안평대군이 말했다. ‘대군의 꿈을 제가 그리란 말씀이시옵니까?’ 하려다가 안견은 입을 다물었다. 안평대군의 얼굴 위를 설핏 지나가는 어둠을 보았기 때문이다. 안견은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방금 전에 들떠서 무릉도원을 얘기하던 사람한테 그 어둠은 가당치도 않아 보였다. 헛것을 보았으리라.
       
    “그리하겠습니다.”
       
    안견은 몹쓸 생각에 사로잡혔던 스스로를 부인하듯 결기를 담아 대답했다. 스물아홉 한창 나이가 아닌가. 대군 같은 사람에게 어둠이라니. 안견이 일어섰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추었다. 그때였다. 몸을 돌려 막 방문을 열려고 하는 찰나 등 뒤에서 안평대군이 꿈에 취한 듯 몇 마디 더듬거렸다.
       
    “이상한 일이로다. 하고많은 사람들이 내 집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리거늘 꿈속에서는 어찌 두어 사람만 동행하게 되었을꼬….”
       
    신음처럼 내뱉은 그 말이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있었음을 안평대군은 알지 못하였다. 1447년 음력 4월 20일, 다음날이었다.
       
       
    “꿈이로다, 꿈이로다”
       
    “그대가 마치 꿈을 꾼 것 같구먼…. 어찌 이리 정확하게 그렸단 말인가. 역시 그대는 신필(神筆)이야.”
       
    안평대군은 벌써 몇 차례나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안견이 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고 사흘 만에 완성해서 들고 간 그림 앞에서였다.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치자마자 험준한 바위 사이로 흐드러지게 핀 복숭아꽃밭이 곧바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과감한 구도였다. 두루마리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칠 때마다 그림의 세계가 서서히 전개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을 감상하려는 사람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려는 의미도 있거니와 서론, 본론, 결론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구조처럼 그림도 이야기를 담아 전개시키려는 의도에서다. 
       
    그런데 이 그림은 전혀 뜻밖이었다. 서론이 생략되고 바로 본론이 펼쳐졌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오솔길을 지나고 골짜기를 건너 한참 만에야 도달했던 복숭아꽃밭이 그림을 펼치자마자 한눈에 들어왔다.

    ‘산벼랑은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은 빽빽하여 시냇물이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의 정신을 홀리는 듯’한 신선세계가 눈부시게 출렁거렸다. 그곳에 지금 복숭아꽃이 한창이다. 안개 속에 푹 잠겨 언뜻언뜻 고개를 내민 꽃잎은 연분홍색 위에 금채(金彩)를 더하여 화려하기가 그지없다. 침식된 듯한 바위에 둘러싸인 꽃밭을 부감법(俯瞰法·위에서 밑을 향해 내려다보듯 그리는 기법)을 써서 한눈에 들어오게 한 구도도 뛰어나다. 꽃밭 아랫부분의 바위를 과감하게 낮춰 감상자의 시선을 가리지 않게 한 발상도 효과적이다. 
       
    환상적인 꽃밭에서 눈길을 거두어 왼쪽으로 향하면 두 팔을 벌린 듯한 기암괴석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복숭아 꽃밭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았다.
       
    “여기를 나가면 현실세계입니다. 이 문을 나서는 순간 당신이 꿈꾸던 아름다운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가시겠습니까?” 
       
    그 말을 뒤로 하고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평범한 야산이 납작 엎드려 있다. 화려한 꽃도 기괴한 암벽도 사라진 언덕 같은 낮은 산이 비루하게 드러누워 있다. 드디어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조선 초기의 문화 수준 가늠자
       
    꿈에서 깨어난 순간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안평대군의 꿈이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陶淵明·365~427)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근거로 했다는 것을. 얘기는 이렇다.

     

    무릉에 사는 어부가 강물 위로 떠내려오는 복숭아꽃을 보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근심 걱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곳은 복숭아꽃이 가득 피어있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그곳에서 꿈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부는 슬그머니 집 생각이 나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바깥세상에 나가더라도 이곳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청했다.

    어부는 약속을 어기고 그곳을 나올 때 곳곳에 표시를 해두었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가 보니 도원(桃源)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도연명의 ‘도화원기’는 당시 글줄이나 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를 듣자마자 곧바로 붓을 들어 사흘 만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문화적인 바탕 위에서 가능했다. 그림의 출처는 도연명의 글이었다. 그러나 안견은 도연명의 글이 아니라 안평대군의 꿈에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몽유도원도’에는 여타의 ‘도원도’에 보이는 어부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말을 타고 돌아다닌 복숭아꽃밭이 강조되었다. 한참을 두 사람이 ‘몽유(夢遊)’하다 나중에야 최항과 신숙주를 만났던 복숭아꽃밭, 도원이었다.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안견의 탁월함에 감탄을 거듭하던 안평대군은 이 그림을 3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붓을 들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라는 제목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신숙주, 김종서, 정인지, 박팽년, 최항, 성삼문 등 세종시대를 대표하는 22명 학자들의 시를 덧붙였다. 이로써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한 작가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단순한 예술작품을 넘어 그 시대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귀한 보물이 되었다. 
       
       
    “꿈에 본 복숭아꽃 비바람에 떨어져”
       
    그런데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열흘을 계속 피어있는 꽃이 없는 것처럼 안평대군의 삶의 꽃도 오래가지 못했다. 안평대군은 자신의 둘째형인 수양대군과의 정쟁에서 꺾여 서른다섯 해를 마지막으로 꽃잎처럼 떨어졌다. 그렇게 속절없이 생짜로 떨어질 사람이 어찌하여 화려한 꿈을 꾸었던고.

    그가 꿈꾸었던 무릉도원 같은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이 지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이상향이었을까. 하고많은 꽃 중에 굳이 복숭아꽃을 보게 된 것도 안평대군의 몽상적인 취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꽃잎 위에 구르는 이슬만 먹고 살기에는 안평대군의 꿈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기에 냉철한 이성을 지닌 수양대군의 눈에는 안평대군의 풍류야말로 나라 말아먹기에 딱 좋은 풍류가의 작태로밖에 판단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수양대군의 입장에서는 꿈만 꾸는 동생이 반석 위에 올려놓은 왕조의 기둥을 무너뜨리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리라. 한 사람의 헛된 꿈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면 그 죄는 죽어 마땅했다.

    이것이 바로 안평대군이 꿈속에 노닐던 복숭아꽃밭에서 숨을 거둔 이유였다. 안견에게 복숭아꽃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꽃밭이 바로 자신의 ‘수목장(樹木葬)’을 치르게 될 장소라는 것을 안평대군은 알지 못했다. 뇌쇄적인 꽃잎이 자신의 주검을 덮어줄 명정(銘旌)이라는 것을. 
       
    ‘몽유도원도’를 보고 찬탄의 시를 썼던 사람들도 양쪽으로 갈라졌다.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정적을 처단하던 계유정난 때 안평대군과 함께 죽임을 당했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는 안평대군의 사후에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정인지와 신숙주는 수양대군 편에 서서 승리자의 영화를 마음껏 누렸다. 조금만 날씨가 더워도 쉽게 상하는 녹두나물을 일컬어 ‘숙주나물’이라고 비아냥거리게 된 내력도 신숙주 같은 변절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 나는 무슨 꿈을 꾸었을까. 오늘밤은 또 무슨 꿈을 꿀까. 나의 꿈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꿈인가.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꿈인가.

     

     

     

     

    동양화가 말을 걸다 ⑥ 김득신 ‘파적도’

     

    사랑은 이런 것 맨발로 뛰쳐나온 아내 낙상한 남편

     

    ▲ 김득신 ‘파적도’ 화첩, 종이에 연한색, 22.5×27.2㎝, 간송미술관

     

     

    우리 사회에서 잘나가는 축에 속하는 사람과 부부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오래전부터 남편과 친분이 있다 보니 덩달아 나까지 알게 된 사람이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그는 매우 소탈했다. 적절하게 유머를 섞어 가며 분위기를 살리는 재주도 뛰어났다. 역시 어느 조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부창부수라고 하더니 부인도 선선해 보였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식사는 행복하다. 나는 이 행복한 자리에 초대해 준 부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새로 출간한 책을 꺼내 사인을 해 주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타났다. “벌써 몇 번째 책을 내시는 거예요?” 여기까지는 좋았다. 내 책을 받아 든 남자가 갑자기 부인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누구는 말이야. 이렇게 책도 여러 권 써서 노년에 대한 걱정을 덜어주는데 누구는 평생 밥만 축내니 세상 참 불공평해. 인세 팍팍 들어오겠다, 평생 정년 없겠다, 김 이사는 지금 당장 회사 그만둬도 되겠어. 정말 부러워요 부러워. 옆에서 이렇게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줘도 살 둥 말 둥한 세상에서 나 혼자 버티려니 내가 흰머리가 안 나게 생겼냐 말이야.”

     

    끊임없이 혼자 투덜거리는 남편을, 그의 아내는 여러 번 겪어봤다는 듯 그저 철없는 아이 보듯 하면서 웃었다. 그러나 그 속이 오죽하랴. 곤혹스러운 남편이 한마디 거들었다. 
       
    “집에 들어가시면 어떻게 뒷감당을 하시려고 그렇게 막말을 하세요?” 
       
    남편 말에 눈치 빠른 그가 너무 내질렀다 싶었던지 얼른 분위기를 수습했다.
       
    “현관 들어가자마자 바로 손들고 서 있어야지, 뭐.” 
       
       
    정적을 깬 고양이 때문에
       
    김득신(金得臣·1754~1822)의 ‘파적도(破寂圖)’는 한가로운 봄날, 한 농가에서 일어난 소동을 그린 것이다. 흐뭇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에 한 남정네가 마루에 앉아 자리를 짜고 있었다. 마당에서는 암탉이 모이를 주워먹고 있었고 어미닭을 따라 병아리 몇 마리가 종종걸음을 하는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갑자기 암탉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디에 숨어 있었던지 보이지 않던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병아리를 물고 잽싸게 달아나고 있었다. 새끼가 물려가는 것을 본 어미닭은 애간장이 녹은 듯 고래고래 악을 쓰며 고양이를 쫓아가고 있고, 혼비백산한 다른 병아리들은 부딪치고 넘어지면서도 도망가느라 바쁘다.
       
    “이놈의 고양이 새끼!”
       
    사태를 즉각적으로 파악한 남정네가 담뱃대를 집어 들었다. 후다닥 일어나 고양이를 향해 힘껏 내려쳤다. 아, 그런데 마음이 너무 급했던 탓인가. 고양이는 잡지 못하고 자리틀과 함께 마루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머리에 쓴 탕건도 날아갔다. 남편이 낙상하는 걸 본 아낙네가 맨발로 뛰쳐나와 고양이를 잡아보려 했지만 상황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아 보인다. 고양이 한 마리의 등장으로 고요한 평화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당은 아수라장이 됐다. 
       
    이 작품은 책마다 조금씩 다른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런데 ‘들고양이가 병아리를 훔치다’라는 뜻의 ‘야묘도추(野猫盜雛)’보다는 ‘정적을 깨다’라는 의미의 ‘파적도(破寂圖)’가 더 적절해 보인다. 사건의 발단은 고양이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은 부부간의 애틋함이다. 마당에 떨어져 자칫 허리가 다칠지도 모르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마음이야말로 정말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든 ‘파적(破寂)’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순간적인 상황을 생동감있게 포착한 작품이면서 해학적 표현미가 돋보인다.
       
    긍재(兢齋) 김득신은 김홍도(金弘道)의 뒤를 이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풍속화가다. 그의 아버지 응리(應履)와 큰아버지 응환(應煥)이 모두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이었고, 동생 석신(碩臣)과 아들 건종(建鍾), 하종(夏鍾)까지 도화서 화원인 대표적 화원 집안이었다. 그의 풍속화는 깔끔하게 주제만 표현한 김홍도의 작품과 달리 꼼꼼하게 배경 묘사에 정성을 들인다.

    ‘파적도’도 예외가 아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모든 사태가 파악될 정도로 상황 묘사가 친절하다. 감상자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붓끝으로 직접 시시콜콜 설명해줘야 직성이 풀리는 김득신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자상하다 못해 부담스럽기까지 한 그의 성격이 짐작되어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덕분에 ‘파적도’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의 남편에 대한 마음이 절절이 배어 있어 ‘차마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고 만다. 
       
       
    ‘밤이 먹고 싶으면 내게 먼저 말하시오’
       
    부부간의 사랑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다. 퇴계는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후 권질의 여식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권씨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집안에서 겪은 여러 차례의 사화(士禍)를 지켜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죽고 난 후 딸의 장래가 걱정되었던 권질은 퇴계가 문안 인사를 왔을 때 자신의 유일한 혈육을 거둬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퇴계는 그러마고 승낙한 후 그녀에게 정식으로 새장가를 들었다.
       
    정상이 아니었던 권씨 부인은 일마다 말썽이었다. 한번은 친척들이 다 모여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제사상에 올린 밤을 가져다 먹었다. 이를 본 퇴계는 밤을 한 움큼 집어서 부인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부인, 앞으로는 밤이 먹고 싶으면 내게 먼저 말하시오.”
       
    그러면서 기겁을 하는 사람들에게 태연히 말했다.
       
    “아마 조상님들께서도 당신께서 드시는 것보다 후손이 맛있게 먹는 걸 더 좋아하실 것이오.”
       
    이런 일화는 몇 가지가 더 전해지는데 퇴계는 한번도 권씨 부인의 모자란 행동을 나무라거나 야단치지 않았다. 한번은 문상을 가야 하는데 도포 자락이 해진 것을 알고 부인에게 꿰매 달라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빨간색 천을 덧대어서 꿰매 왔다. 퇴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도포를 입고 문상을 갔다.
       
    부부간의 불화를 겪고 있던 제자가 있었다. 그는 10년이나 부인과 각방을 쓸 정도로 부부 사이에 골이 깊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퇴계는 어느 날 고향으로 떠난다는 제자를 아침식사에 초대했다.

    스승님 내외와 겸상을 하게 된 제자는 여러 차례 놀랐다. 명성이 자자한 스승의 초라한 밥상을 보고 놀랐고, 온전치 못한 스승 사모님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 놀랐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예절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부인을 스승이 한결같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제자는 느끼는 바가 많았다.

    아침식사 후 떠나는 제자에게 퇴계는 슬며시 편지 한 통을 건네주며 나중에 뜯어보라고 말했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결혼은 하늘의 질서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만약 네가 너의 아내를 지금처럼 학대하고 너 스스로를 훈련할 수 없다면 무엇을 배우려느냐?’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일제강점기 일본 미술평론가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쓴 ‘미의 법문’을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선인(善人)도 왕생(往生)하는데 하물며 악인(惡人)이야.’ 
       
    처음에는 번역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악인이 왕생한다면 당연히 선인도 왕생한다는 표현을 착각했으리라 짐작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일본 정토종을 개창한 호넨(法然·1133~1212) 스님과 신란(親鸞·1173~1263) 스님이 남긴 유명한 이 말은 불보살(佛菩薩)의 위대한 자비심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다.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중생이 구제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격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구제한다는 뜻이다. 모든 위대한 성인(聖人)들의 자비는 계산적인 중생이 상상하는 그 한계 너머에 있다.

    그분들의 아량은 남보다 뛰어난 미모, 든든한 재력, 탁월한 능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중생의 옹졸함을 무색하게 한다. 종교적 계율, 경전의 가르침, 한 사회를 지배하는 관습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을 부처는 자비(慈悲)로 보여주었고, 공자는 인(仁)이라고 했으며, 퇴계는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실천했다. 자비, 인, 측은지심 같은 마음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남편이 다칠까봐 맨발로 뛰어가는 마음, 모자란 부인을 존경심을 다해 감싸주는 마음, 그것이 사랑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현관문에 들어서면 손들고 서 있겠다고 한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정육
       
    홍익대 한국회화사 석사, 동국대 박사 수료, 성신여대·동국대 대학원 강의, 저서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선이 낳은 그림 천재들’ ‘그림공부, 사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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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송 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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