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慧超, 704~787)는 신라 시대의 승려이다. 밀교를 연구하였고, 인도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719년 중국의 광주에서 인도 승려 금강지(金剛智)에게 배웠고, 723년경에 4년 정도 인도여행을 한 뒤, 733년에 장안의 천복사에 거주하였으며, 780년에는 오대산에서 거주하였다.
불교의 본고장으로 향한, 순례자의 길
전인미답(前人未踏),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어간 사람의 전통이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한 전통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구도(求道)의 길을 따라 인도까지 걸어서 갔다 온 순례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사람 아리나발마는 처음에 불교의 본디 모습을 보러 중국에 들어갔는데, 용기가 더욱 솟아 결국 오천축국까지 이르렀다. 오천축국이란 인도 북부 지방에 있었던, 부처님이 나신 나라를 비롯한 다섯 천축국을 말한다. 중천축국과 동서남북의 넷, 그래서 오천축국이다. 아리나발마는 나란타사에 머물며 ‘율론을 많이 열람하고 패협에다 베껴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웬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 모양이다.
패협은 패엽이라고도 쓰며, 경전을 기록하는 기다란 나뭇잎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뭇잎을 재료로 한 고급 종이인데, 살생을 금한 불교의 법칙에 따라 동물 가죽 대신 썼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패협은 무척 고급스럽게 보인다. 가난한 순례자들은 제 몸의 치장 대신 이 종이를 사는 데 재물을 모두 바쳤으리라. 나란타사는 중인도 마갈타국에 있던 절인데, 5세기에서 12세기까지 불교를 가르치던 대학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서유기]로 잘 알려진 손오공의 스승 현장도 이 절에서 5년간이나 머물며 공부했다.
이 같은 이야기를 일연은 중국 승려 의정의 [구법고승전]에서 전적으로 인용해 [삼국유사]에 적어놓았다. 본디 이름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으로, 7세기 말 의정이 스스로 인도순례를 하며 지은 책이다. 인도까지 구법 여행을 한 승려들의 전기를 실은 것인데, 아리나발마를 비롯한 모두 60인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동국(東國)인 곧 신라 사람이 무려 9명이나 된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15%에 달한다. 한편 각훈의 [해동고승전]에는 의정의 승전에 없는 현조와 현대범이란 이름이 보인다. 의정의 승전에 나오는 현태와 구본이 이들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숫자는 더 불어난다.
귀(歸), 한번 가서 돌아오지 못한 순례자들
그러나 [왕오천축국전]의 지은이인 혜초는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인도로 가는 그 길이 얼마나 험했는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이 혜초인데 말이다. 먼저 [왕오천축국전]에 실린 그의 시 한 편을 읽어보자.
차디찬 눈은 얼음과 엉기어 붙었고 찬바람은 땅을 가르도록 매섭다 넓은 바다 얼어서 단을 이루고 강은 낭떠러지를 깎아만 간다
사실 이 책은 그 전부가 남아있지 않아 그의 여행경로며 보고 들은 자세한 것을 다 알 수 없다. 둔황 석굴의 깊은 곳에 묻혔다가 세상의 빛을 다시 본 것이 겨우 100여 년 전, 그것으로 신라 출신이라는 사실 말고는 고향이며 죽은 곳도 알 길 없지만, 719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5년 동안 수학한 다음 결행한 4년간의 인도 여행을 어렴풋이 전해준다.
겨울날 투가라국에 있을 때 눈을 만나 그 느낌을 읊은 이 시에서 우리는 무시무시한 고행의 한 단면을 읽을 뿐이다.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용문(龍門)엔 폭포조차 끊기고 말았으며 정구(井口)엔 뱀이 서린 듯 얼음이 얼었다 불을 들고 땅끝에 올라 노래 부르리 어떻게 저 파밀고원 넘어가리오
뱀이 서린 듯 얼어붙은 얼음길을 오르는 그의 가슴 속에는 불 같은 열정이 가득 차 있다는 뜻일까? 그럼에도 파밀고원은 멀기만 하고 생사를 오가는 여행길은 불안하기 그지없었으리라. 그런데도 두려운 마음을 때로 기도하며 때로 노래하며 풀어내고, 사막과 얼음 구덩이로 발걸음을 옮긴 그들에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다는 것일까? 같은 길을 따라 거슬러 왔던 전도자들을 생각하며 걸었던 것일까?
해동의 작은 나라 신라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아리나발마처럼 처음에는 중국까지만 가려다가 인도까지 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인도 여행을 목적으로 출발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모두 한 번 가서 돌아오지 못했음은 분명하다. 아니 돌아오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가 서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이들의 기록에다 ‘귀축제사(歸竺諸師)’라 제목을 붙인 것은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귀(歸), 가고서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곳이 진정 돌아갈 곳이었는지 모른다.
혜초의 천축 여행 시작점이었던 평택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09년 5월 평택호 인근 모래톱 공원에 혜초 기념비를 세웠다.
중국 정통 밀교의 법맥을 이은 혜초
아리나발마는 ‘돌아오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나란타사에서 죽는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현태는 그나마 중국까지 돌아온다. 그러나 그 역시 어디서 죽었는지 전해지지 않는다. 순례자의 마음이지만, 범인(凡人)의 그것에 조금이나 가까운 것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 하나일까? 혜초는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 고향은 하늘 끝 북쪽 땅 한 모서리 서쪽은 남의 나라 남천축 해 떠도 기러기 한 마리 없어 누가 내 집으로 돌아가리
기러기 발목에 편지를 묶어 날렸다는 고사가 있거니와, 그런 기러기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막막한 심정이 잘도 그려져 있다. 혜초가 언제 어떤 연유로 중국을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기록으로 그가 중국 밀교의 초조(初祖) 금강지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 719년, 곧 그의 나이 열다섯 살일 때인 것으로 알려졌다. 금강지는 인도 출신의 승려이다. 스승의 문하에서 5년을 수학한 혜초는 감연히 인도 여행을 떠난다. 갈 때는 해로로, 돌아올 때는 육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둔황의 석굴(제 17굴, 장경동)을 조사하는 펠리오. 그는 둔황 석굴에 보관되어 있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프랑스로 가져갔다. <출처 : 강병기 at ko.wikipedia.com>
그가 남긴 [왕오천축국전]은 오늘날 우리에게 8세기경, 인도 풍경을 소략하게나마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이다. 물론 그의 존재는 1908년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P. Pelliot, 1878~1945)의 둔황 석굴 발견과 1909년 중국인 나진옥(羅振玉)의 손을 거쳐, 1915년 일본인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천 년 세월의 긴 잠을 잔 책이 바로 [왕오천축국전]이다.
그대 서번이 멀다 한숨짓는가 나는 탄식하네, 동쪽 길 아득하여 길은 거칠고 설령(雪嶺) 높은데 험한 골짝 물가에 도적떼 소리치네
새는 날아가다 벼랑 보고 놀라고 사람도 가다 길을 잃는 곳 한 생애 눈물 닦을 일 없더니 오늘은 천 갈래 쏟아지네.
‘서번 가는 사신을 만나’라는 제목의 시이다. 서번(西蕃)은 서쪽 오랑캐 나라인 토번이다. 지금의 서장이라 부르는데, 이때는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두 나라의 문물을 교류하며 번성하였다. 설령(雪嶺)은 눈 쌓인 봉우리이지만, 여기서는 히말라야 산맥을 일컫는다.
한참 인도 여행이 무르익을 무렵, 혜초는 우연히 서번으로 가는 중국 사신을 만나게 된다. 설령은 도적떼 출몰하는 계곡이었기에 대국의 사신답지 않게 코를 빼고 가고 있다. 처량한 모습이다. 그러나 하늘 나는 새마저 놀라는 길을 사람이 무슨 재주로 편히 지날 수 있겠는가. 승려인 혜초마저 펑펑 눈물을 쏟는다. 그런 고행의 대가(代價)였을까, 혜초는 귀국하여 스승의 총애 아래 수행 정진하여, 중국 밀교의 정통으로 일컬어지는 금강지 불공(不空) 법맥을 잇는 제자로 우뚝 섰다.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혜초가 남긴 몇 편의 시를 통해 우리가 받는 감동은 단지 전인미답의 길에서 정진한 그의 용맹함 때문만은 아니다. 도리어 약하고 쓸쓸한 심정을 숨김없이 내보이는 그 솔직성 때문이다. 지극히 인간적이다. ‘슬픈 죽음’이란 시는 그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 이국 땅 보배로운 나무 꺾이었는데 그대의 영혼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모습 이미 재가 되었거늘
생각하니 서러운 정 애끊고 그대 소망 이루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누가 알리오, 고향 가는 길 흰 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보는 마음.
혜초는 동천축국과 중천축국을 지나 남천축국으로 향하였다. 그의 나이 이십 대 초반. 막 스물 접어들어 여행을 떠나 동서남북중의 다섯 군데로 나뉜 인도를 4년에 걸쳐 여행했다. 이미 동천축국과 중천축국에서 쿠시나가라∙바라나시∙라자그리하∙룸비니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불교의 성지를 둘러본 다음이었다. 그리고 혜초가 북천축국에 이르렀을 때 여행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그곳의 한 절에서 덕망 높은 승려 한 사람이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위의 시는 그에 대한 뜨거운 애도의 노래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혜초와 같은 수행승들은 목숨을 걸고 불법을 찾아 이 사막을 건넜다.
일연의 [삼국유사] 가운데 ‘귀축제사’ 조의 일부를 앞서 소개했다. 인도기행을 떠난 승려들의 아름답고도 장한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 있다. 요즈음도 인도기행이 상당한 붐을 이루지만, 당대 승려들의 여행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것이었다. 목숨을 건 여행의 시종기(始終記),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스릴러 영화의 라스트 신과 달리 살아남은 주인공이 아무도 없다. 일연은 ‘귀축제사’ 조의 끝에 이런 시 한 구절을 남겼다.
외로운 배 달빛 타고 몇 번이나 떠나갔건만 이제껏 구름 따라 한 석장(錫杖)도 돌아오지 못했네
달빛 타고 떠나간 순례자(석장) 가운데 구름 따라 돌아온 이 아무도 없다. 혜초는 “고향에선 주인 없는 등불만 반짝이리”라는 첫 행부터 사람의 애를 끊는 표현으로 시작하였다. 이 한 줄로 그 심정을 헤아리기에 족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