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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고택(李相和 古宅)
~ 출 생 ~
이상화는 1901년(광무 4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부 서문로 12번지의 양옥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이며,
어머니는 김신자(金愼子)로 김해 김씨이다.
4형제 중 둘째이다. 형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아우 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아우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그의 집안은 대구의 명문가로 대 부잣집이었으나
아버지 이시우는 둘째 아들이었다.
~ 성장과정 ~
1915년 경성부의 중앙학교
(지금의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봄에 경성 중앙학교를 중퇴하였고,
자퇴 직후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
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백기만 등 친구들과 함께 3·1 만세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
밀정의 추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잡혀가자
경성부로 올라와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 한동안 은신하였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월단 박종화(朴鍾和)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박종화의 소개로 홍사용(洪思容), 나도향, 나혜석,
박영희(朴英熙), 이광수, 최남선 등 문인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1922년 《백조》 1호에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세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백조》 나머지 호,
《개벽》, 《문예운동》, 《삼천리》, 《여명》, 《신여성》,
《조선문단》, 《조선지광》, 《별건곤》등 잡지에
〈나의 침실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6편이 실렸고,
이기철 편 《이상화 전집》(문장사, 1982)과
김학동 편 《이상화 전집》(새문사, 1987),
대구문인협회 편 《이상화 전집》(그루, 1998) 등
세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대표적인 작품들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이다.
~ 생애 말기 ~
1937년 3월 만주에 있던
큰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그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그해 11월 말경 가석방되었다.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교남학교에
조선어,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했다.
또한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하여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약소 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도 권투를 넣었는데,
교남학교 권투부 출신들은,
졸업후 훗날 대구 권투 클럽을 결성하였다.
1940년 대구부 계산 2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가 새로 마련한 집 바로 앞에는
국채보상운동
1940년말 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부 계산2동 84번지의 집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해부터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어 한국 국문학사와 불란서시정석 등을
한글로 번역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만다.
1943년 초 갑자기 쓰러졌다가
그해 3월에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경상북도 대구 자택에서 숨졌는데
이상화의 오랜 친구인 소설가 현진건도 같은 날
경성부에서 폐결핵과 장결핵의 합병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 고택(古宅) 보존 ~
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詩碑)를 달성공원에 세웠다.
1999년 대구광역시 도시개발로 한때
서상돈 고택 및 이상화 고택까지 허물 위기에 맞았으나
1999년부터 시민운동 차원에서
고택보존 운동에 이르렀고 2008년 8월 13일 결실을 맺어
이상화 고택 개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2008년 8월 12일 새롭게 단장되어
일반인들에게 문을 열었다.
도시개발로 헐릴 위기까지 맞았던
이상화 고택이 시민들의 모금활동과
100만 서명운동 등으로 보존, 공개되었다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반일(反日) 민족의식(民族義識)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民族魂)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民族)의 비애(悲哀)와 일제(日帝)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 이상화(李相和) ~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2 0 1 4. 1 0. 6. 하 얀 머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