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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강릉시 여행) 우리나라 국보가 강릉에 있다..???....강릉 임영관 객사문

한아름 (40대공주~~) 2013. 2. 2. 13:13

안녕 하세요.

대관령꽁지 입니다.


제목을 본후 의아해 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강원도에 유일한 국보가 있음을 많은 분들에게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분들도 많으시겠지요.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문만 남아있습니다.


임영관지로 관아를 재현해 죄인들의 형틀과 곤장들도 있고

관아내 작은 도서관... 


국보인 임영관삼문,칠사당,전대청,중대청,동대청,서현,

태조이성계 집현전터가 있으며...

 

공민왕 칠필로 전해지는 

임영관 현판이 있는곳 입니다.


강릉 여행을 오시는 분들이면 

이곳에 들려서 역사도 배우고 좋은 추억을 하지 않을까요.






칠사당

조선시대 관공서 건물로 

일곱 가지 정사 (호구,농사,병무,교육,세금,재판,비리 단속에 관한일) 를

베풀었다 하여 칠사당이라 불리었으며

이 건물의 최초 건립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1632년(인조 10)에 고쳐지었고,

1726년(영조2)에 크게 수리를 하였으며, 1866년(고종 3)에는 진위병의 군영으로 쓰이다가

이듬해에 화제로 타 버린 것을 강릉 부사 조명하가 다시 지였다고 합니다.

 

일제 강정기에는 일본의 수비대가 사용하였고,

그 후에는 강릉군수 및 강릉시장의 관사로

1958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정면 좌측에 누마루 (다락같이 한층 높게 만든 마루)를 별도로 달아 낸 'ㄱ'자형

평면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측면 1칸은 툇간(건물의 덧달아 낸 칸, 물림칸)으로

되어 있고, 오른쪽 뒤편에도 방 2칸과 툇마루(방이나 마루 바깥에 붙여 꾸민 좁은 마루)를 툇간으로 구성되며

누마루 부분의 4개 기둥과 전면의 툇기둥은 둥근 기둥으로 둥근형 초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익공(창방과 직교하여 보를 받치며 쇠서 모양을 내고 초각한 공포재의 하나) 양식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이 건물은 조금씩 변형되어 조화를 잃은 면도 보이나,

전체적으로 관청의 위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강릉 임영관은

 강릉시 임영로 131번길6 자리하며,

강릉부 객사 건물인 임영관의 터이며,

객사는 지방으로 출장온 중앙관리의 숙소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강릉의 객사는 "강릉부 읍지"건치연혁에 따르면 

"고려 태조 19년인 936년에 강릉을 동원경이라 칭하고 임영관을 창건"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창건 당시의 규모 등은 확인할 수 없고,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되어 왔으며, 

일제시대 강릉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면서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강릉시청사 신축을 위해 수목의 채굴과

 구 강릉경찰서 지하구조물의 철거 과정에서 임영관 건물지 및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건물 하부구조와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어 

1994년 7월 11일 사적 제38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0년부터 전통문화도시 도심관아유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임영관내 전대청,중대청,동대청,서현의 4개동의 건물을 비롯해 석축,담장 등 복원을 추진하여 2006년 완료되었습니다.


임영관은 객사문 및 부사가 업무를 살폈던 칠사당과 함께 

강릉의 관청 건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강릉 임영관 삼문 


국보 제51호로 객사란 객관 이라고도 하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청건물의 하나로 

임영관 삼문은 객사의 정문입니다.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묵었던 장소로 

조선시대에는 객사의 건물 중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전대청에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하여 절을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강릉부 객사인 임영관은 고려 태조 19년(936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중수되었던 것으로 발굴 조사 결과 확인 되었습니다.


임영관 삼문은 고려 말에 지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으로 강원도내 건축물 중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며,

간결하고 소박한 주심포계 양식과 맞배지붕의 삼문입니다.


배흘림 기둥은 현존하는 목조문화재 중 가장 크며,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의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 말, 조선 초기 건축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노후와 변형으로 최근 완전 해체,보수하였으며,

공민왕 친필로 전하는 임염관 현판이 임영관의 철거 시 임영관 삼문에 걸었던 것을 

2006년 10월 임영관 복원 준공 후 본래의 위치인 전대청에 옮겨 걸었답니다.


중대청


 이 건물은 고려 건축양식으로 전면3칸 측면4칸의 맛배지붕 주심포 양식인데,

건물의 용도에 대하여는 관찰사의 순력 등을 위한 장소로 추정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서현 


이 건물은 우측의 동대청과 더불어 사신등이 숙식을 하던 곳으로 

구조는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동대청보다 규모가 작습니다. 


이용규정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수교집록에 의하면 사신 일행 중 정3품 관료들이 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전대청


이 건물은 객사의 정청이자 중심공간 입니다.


전대청에는 왕의 전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절을하는 망궐행례를 행하였던 곳이며,

사신 및 외관이 왕에게 글을 올리거나,

왕이 내리는 향을 맞이하는 의식,

관찰사 순행시 지방관이 연명 등을 행하던 곳으로서 

우측의 동대청과 서현에 비해 지붕이 한단 높게 지였졌습니다.


동대청

 

이 건물은 좌측의 서현과 더불어 사신 및 중앙관료들의 숙식 및 연회.

재판.국가 경사 및 애사시 망곡 등을 하던 곳이며.

구조는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서현보다 규모가 큽니다.


이용규정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수교집록에 의하면 문,무관 구별없이 사신 일행 중 품계가 2품이상은 동대청을 이용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서현보다 위계가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망궐행례 의식 


외직에 근무하는 관원이 직접 왕을 뵙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향해 예를 행하는 의식으로 

지방관은 객사 중앙의 정청에 왕과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만들어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정월 초하루와 임금이나 왕비의 탄신일,한식 단오,추석,동지 둥의 명절에 

궁궐을 향하여 망궐행례를 올렸으며,

1896년 대한제국 성립으로 폐지 되었습니다


화재로 소실된

태조 이성계 집경전터 복원을 했으면 합니다.

















출처 : 대관령 꽁지네
글쓴이 : 대관령꽁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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