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전설과 사랑이 어우러진 한국의 다리들

한아름 (40대공주~~) 2019. 11. 7. 11:06

불국사 백운교와 청운교

 

다리란 간단하게 물이나 깊은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물론 다리라는 것은 그런 이유로 인해 가설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다리는 단순히 물이나 계곡을 건너기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다리가 가설이 될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며, 어느 다리나 이야기 하나쯤은 전해진다. 또한 다리는 세시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다리는 단순한 축조물이 아닌, 나와 남을 연결해주는 하나의 연결고리가 형성된다. 이것은 곧 우리민족의 공동체와 무관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다리는 단지 개울을 건너야 한다는 것만이 아니고, 종교적인 차원으로 보면 불국토를 들어가는 상징적인 연결통로로, 그리고 실생활에서는 이웃을 연결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건너서 이웃과 소통을 했으며,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문물을 구입하기도 하는 등,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구조물 중에 하나이다. 다리는 언제나 석조물로 된 것만은 아니었다. 나무로 서로 엮어 매어 임시로 가설을 하거나, 목책을 세우고 그 위를 흙으로 덮은 목교(木橋)도 상당수 있었다.  하기에 다리의 종류도 다양해서 구름다리라고 하는 홍교, 너다리 혹은 널다리라 부르는 판교, 양편을 단단히 묶어 하공에 떠 있는 매단다리 등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형식뿐 아니라, 누다리, 배다리, 잔교, 흙다리, 섶다리 등 오늘날 보이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다리가 사람들을 연결하는 통로로 이용이 되었다. 실제로 내 어릴 적만 해도 서울의 한편이지만 동네 앞을 흐르는 개천에 나무다리가 있었는데, 검은 칠을 해서인가 ‘검정다리’라고 부르던 다리가 1960년대 까지도 있었다. 또한 낮은 내의 듬성듬성 돌을 갖다 놓은 징검다리도 많이 볼 수 있었다.

 

담양 죽녹원 앞 개울의 징검다리 


예부터 한국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다리가 많이 만들어졌다. 진보된 기술과 형식을 갖춘 다리가 축조된 것은 삼국시대 이후로 추측이 되는데, 기록에 보이는 최초의 다리는 413년 완공된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로, 대교라는 표현을 통해 당시로서는 대대적인 공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평양주는 현재의 경기도 양주라는 설이 있으나 그 위치는 확실하지 않다. 그 밖의 기록에 삼국시대의 여러 다리들이 전해오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불국사의 자하문에 이르는 청운교와 백운교, 안양문에 이르는 연화교와 칠보교이다. 이 다리들은 계단식으로 조성된 특수 구조로 장방형의 돌기둥에 반원형의 아치를 올려놓은 형태로 아치교의 수법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청운교·백운교의 33단 계단은 삼십삼천(三十三天)을 상징하고, 연화교·칠보교는 계단에 연꽃을 새겨 불국토(佛國土)에 이르는 길을 상징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찰의 다리는 일반적인 연결의 의미 이외에 속세에서 부처의 세계, 즉 불국토에 이르는 관문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전라남도 함평 영산강 지류에 놓인 고막석교(古幕石橋)는 남한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려시대의 다리로, 목조에서 석조로 바뀌는 구조적 변화를 보여준다. 돌기둥을 세우고 멍에를 걸고 그 위에 장연을 얹어 반턱 쪽에 판석을 깔아서 노면을 만든 평교형식이다. 1274년 승려 고막이 가설했다고 하며 일명 떡다리 또는 똑다리라고도 한다. 이렇듯 다리는 그 위치나 지형, 강이나 개울 폭의 너비에 따라서 그 형태가 달랐다. 또한 절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다리들은 그 의미가 세속과 부처의 불국토를 연결하는 의미를 갖고 있는 등 다리마다 그 사연이 다르다.

 

보물 제1372호 함평고막석교

 

일반적인 다리는 국가에서 책임을 지고 가설을 하였으나, 민초들이 살아가기에 필요한 곳에 임시로 만드는 것이 흙다리였다. 흙다리란 말로만 흙다리일 뿐 실제로 흙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다리의 받침은 나무로 만들고, 그 위를 나뭇가지나 통나무를 깔고 평평하게 흙을 덮은 다리를 말한다. 나무다리의 경우는 쉽게 설치를 할 수가 있어서 편리하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나무다리는 그 내구성이 강하지 않아 남아 있는 것은 없고, 그 다리가 있던 흔적이 전해질 뿐이다.

 

한국민속촌 흙다리

 

널다리라고 하는 나무다리는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이 되었는데, 이는 손쉽게 가설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지명 중 판교, 혹은 너더리라고 부르는 곳은 모두 나무다리가 있던 곳들이다. 돌다리는 가장 많이 사용이 되었으며, 여러 가지 기법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축조가 되었다. 돌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돌을 이용한 각종 다리가 전해지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선암사 승선교, 보성의 홍교, 고성 건봉사의 능파교 등이다.

 

창덕궁 금천교

보물 제400호 선암사 승선교 

보물 제563호 홍교 

강경 미내다리 


충남 논산시 강경에 가면 미내다리가 있다. 이 미내다리는 1731년 충청과 경상, 그리고 전라 삼남을 연결하는 조선 최대의 석교로 놓여졌다. 이 미내다리는 전국의 수많은 장사치들이 이 다리를 건너다니면서 삶을 영위하기 위한 통로로 삼았을 것이다. 강경장은 사람들이 한창 북적일 때는 하루에 2~3만명이 모일 정도였다고 하니, 19세기 말에 이렇게 큰 장은 그리 흔하지가 않았을 것이다. 오직하면 강경포구에는 당시에 술집이 100여개가 넘었으며, 하루에 그 술집들이 사용하는 고기가 암소 10마리였다고 한다. 또한 소금을 한배 싣고 들어온 선주들이 강경포구의 선술집 아가씨들에게 반해 소금 판돈을 다 탕진한 후 ‘소금 한배를 다 처먹고도 짜다는 말이 없다’라는 말이 전해진 것일까? 지나가는 개도 생선을 물고 다녔다는 강경장이다. 그러한 강경장을 연결하는 것이 바로 미내다리였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을 만나면 ‘너는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느냐?’고 묻는다고 한다. 이는 여한이 없으려면 미내다리를 보고 죽으라는 뜻이라고 하지만, 그 보다는 이 다리를 이용해 건너야 볼 수 있는 강경장의 번화함을 보았느냐는 말로 풀이된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다리는 단순히 연결통로로만 사용이 된 것이 아니고, 그 안에 갖은 이야기와 함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새가 숨 쉬고 있다. 올 여름 온 가족이 함께 다리를 찾아 그 다리에 얽힌 전설을 담아오는 여행을 한번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다양한 다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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