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누군가의 설치미술일까 했다. 가끔 지나치던 공원의 한 구석, 이 담장은 눈여겨 보지도 않았고 이어진 돌담이 좋아 자주 들리던 장소였는데.... 전에는 나무나 풀숲이 우거져 보이지 않았던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강한 끌림이 있었다.
불규칙하게 새겨진? 아니면 그려진 작품들에 눈길이 머물렀다. 거친 붓질의 회색빛 바탕에 아무렇게나 배치된 그림들.
자세히 봤다. 오른쪽엔 누군가의 우악스런 팔에 잡혀 끌려가는 소녀의 모습은 공포에 질려 있다. 그제야 담장에 그려진 그림들의 메시지를 알 수 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저렇게 끌려가기 전 그녀들은 모두 그 나이에 걸맞는 꿈을 꾸며 가슴 설렌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곱게 머리를 빗고 늘 푸새질 잘한 옷을 숯불 다리미로 마무리 해서 이쁘게 단장을 했을 것이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동무들과 어울려 소곤 소곤 비밀이야기도 하고 호롱불 아래서 옷을 깁기도 하고 실패를 감기도 했을 것이다.
어느 날 느닷없는 검은 마수에 끌려가기 전까지.
그리고 긴 세월 땅에 떨어진 꽃잎처럼 짓밟히고 으스러진 아픔의 터널을 지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 조그만 희망의 씨앗 하나 버리지 않고 꼭 쥐고 있었을 것이다. 돌아갈 수 있기를.
사죄하지 않는 그들, 왜곡시키며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사람들, 이 무언의 메시지를 보면서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진정 그들은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아닐까.
요즘 어떤 드라마에서 '인간다움은 어디서 올까요' 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한다. 물론 뉘앙스는 전혀 다르지만.
공원 한 구석에서 조용히 전하는 이야기에 한참을 머무르며 나는 과연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는지 돌아보았다. 어쩌면 방관자들도 똑 같지 않나 싶은 생각에 무거워진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원엔 여름꽃들이 무심하게 피고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