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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세한도

한아름 (40대공주~~) 2019. 6. 26. 11:21

추사 김정희와 세한도에 얽힌 가슴 뭉쿨한 이야기



 

추사 김정희와 세한도에 얽힌 가슴 뭉쿨한 이야기

 

세한도(국보.180호)1844년작

여러분이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님은 추사라는 호 말고도 완당이라는 호로도 유명합니다.

그밖에 수십개에 달하는 호를 쓰기도 했지만 추사와 완당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입니다.

완당 김정희는 판서를 지낸 유당노경의 맏아들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연경을 왕래하며

최고의 중국통으로써 청조경학이난 학계문단에 밝아 청조 명류와도 친교가 많았던 당대 엘리트 지식인 이었다.

24세에 소과에 합격하기 시작하여 종2품 병조판서(오늘의 차관급)에까지 오르게되고 동지부사로도 선발되게 된다.

조정에서도 그의 학문의 실력을 인정하고,청조의 새풍조를 따르는 항상 앞서 가는 신지식인이었기때문에 주위의 시샘이 따랐다

그러다,윤상도의 옥(죄로 처형을 받게되는사건)에 관계되었다고하여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다.

이때 완당의 나이 55세로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들어 제주도 귀양살이는 9년이나 되는 고통의 긴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의 제주도 유배생활은 아무도 없는 섬에서모든것을 도와 주는 이 없이 살아야 하는 큰고통의 세월이었는데

그속에서 선비로써 낙이라면 오로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 뿐이었다.

완당의 처지가 벼슬이 떨어지고 9년에 이르는 유배생활을 하게 되자 모든 주위의 인심은 바뀌었다.

사람들의 인심도 예전같지 않은 속에서도 완당의 제자중 이상적이라는 제자는 스승을 잊지않고

중국에 역관(지금의 통역관)으로 드나들며 스승을 생각해서 귀한 책을 구해 계속 유배지로 보냈다.

당시도 범죄자를 도와 주면 도와준 사람도 크게 벌을 받게 되므로 사람들은 감히 엄두내기가 어려웠다 .

완당은 그런 위험을 무릎쓰고 계속해서 책을 보내 주는 제자가 너무 고마워 세한도를 그렸다.

그림의 크기는 세로 23.7센티에 가로109센티미터로 그림만은 별로 크지않은 크기지만

여러사람의 발문(그림을 보고 느낀감상이라든가 등 느낌을 쓴글)이 붙어있어 세한도를 펼치면 10미터에 이른다(두루마리식)

그림의 구도를 설명하면,왼쪽엔 잣나무 두 그루와 그 옆으로 초라한 초막집과 꼿꼿이 서있는 소나무 두그루를 그리고

오른쪽에 김정희 필치의 화제와 낙관이 찍혀있는것이 전부이다.

단순하기도 한데다가 먹물이 묻은 붓을 꼭 짜서 마른 붓질로 까실 까실한 느낌이드는 갈필을 많이 써서 황량한 느낌과 함께

메마르고 차가운 먹색이 어우러져 외롭고 초라한 유배생활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고고한 문기를 강렬하게 발산하여 김정희 문인화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구도도 삼각구도를 잡아 단순한 작품속에서도 안정성을 이루고

필력있는 필치로 글씨하나,낙관한점 찍는것에 소홀함이 없는 작품이었다.

그림에 김정희 자신이쓴 시제에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라고 쓰여있다.

이뜻은 "아주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잣나무와 소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처지가 뒤바뀌어 주위의 인심이 변함을 말하기도 하고 자신의 힘든 유배생활을 세한(추운겨울의 심한추위)에 비유하여

그런 속에서도 송백과 같은 변함없는 의지로 선비의 기상을 잃지않겠다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표현하고,

또한 곁들여 완당의 발문에 사람이 한번 잘 살다 못살아 보면 주위에 인심을 알수 있는데

예전의 제자 이상적의 처세는 칭찬할게 없으나(스승에게 제자가 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뜻)

'지금의 이상적의 처신은 어느성인이라도 칭찬할 것이다'라고 제자 이상적의 스승에대한 변치않는 의리에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완당은 아마도 당시의 어려움을 세한속의 꼿꼿한 송백을 표현하면서 자신의 슬픔을 굳은 의지로 이겨나간 것 같습니다.

이 그림을 받는 이상적은 이듬해에 중국 북경에 가게되어 스승의 옛 친구인 오찬의 잔치에 초대 받아 간 자리에서 스승의 세한도를 내보였다.

이때 함께 자리했던 청나라 문사 16인은 이 그림을 감상하고는 그 어려운 유배생활 속에서 세한도에 표현한 김정희의 마음을 십분 헤아리고

세한도의 높은 품격과 사제간의 깊은정에 감격하여 저마다 이를 기리는 시문을 남겼다.

그후, 이상적은 자신의 제자 매은 김병선에게 그림을 주게되고 그의 아들 소매 준학군이 쓰고 읆으며 보관했으나,

그림이 그려진지 70여년뒤 일제 강점기를 맞아 귀중한 보물과 서적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탈취하니

이때 이 그림도 마침내 경성대학 교수였던 후지쯔까를 따라 동경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후,세계에서 전운이 가장 높은 1844년 서예가인 소전 손재형 선생이 어려움과 위험을 무릎쓰고 현해탄을 건너가

후지쯔까를 여러번 방문 사정하여 사재를 털어 세한도를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세한도가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오니 이를 보고 위대한 한학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이

세한도가 이역으로 전전한 내역과 그동안에 기록된 찬문의 내역을 자세히 적고 세한도를 찾게 된 기쁨을 시한수로 덧붙였다.

이어서 초대 정부 부통령 이시영과 정인보의 평가와 감회의 글과 서예가 손재형의 필치로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가 남겨져있다.

세한도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대상이 된 것은 작가의 농축된 예술적 기질과 고결한 선비의 정신에서 발로 되는 담박함과 지조와 기상,

그리고 사제지교의 아름다움이 이 시대의 교훈이 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하나 더욱 중요한 것은 청나라 유학자 16인의 발문이 있어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어 세한도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지금은 개인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1844년작 작품크기:23.7*109.0cm
소장자:손창근

 

 

 

 

세한도(歲寒圖國寶 제180

 

 이 「세한도」는 불우한 처지에서 귀양살이하는 자신을

조금도 괄시하지 않고 옛날처럼 변함없이 대해주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의 태도에 감동한 나머지,

그의 인품을 엄동이 된 뒤에도 잎이 지지 않는

송백(松柏)의 지조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그려준 것이다.

이상적은 역관(譯官)이고, ()가 우선(藕船)이다.

발문(跋文)내용을 마음속에 새겨 볼만하다.

 

 

발문(跋文)내용

 “거년에 〈만학〉·〈대운〉 두 책을 부쳐 왔고,

금년에는 또 〈우경문편〉을 부쳐 왔는데,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것이 아니고,

머나먼 천만리 밖에서 구입한 것이며,

여러 해 걸려서 얻은 것이요,

일시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세상은 물밀듯이 권력만을 따르는데,

이같이 몸과 마음을 쏟아 얻은 것을

권력자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해외의 한 초췌하고 고고(枯槁)한 사람에게 주기를

세상이 권력가에 추세하는 것과 같이 하니,

태사공이 이르기를 ‘권력으로 합한 자는

권력이 떨어지면 교분이 성글어 진다’고 하였는데,

()도 역시 이 세상 사람으로

초연히 권력에 추세하는 테두리 밖을 떠나서

권력으로 나를 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잘못된 것인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세한 연후에야 송백의 후조를 알게 된다.’고 하였으니,

송백은 사철을 통해 시들지 않는 것이라면,

세한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하나의 송백인데,

성인이 특히 세한을 당한 이후를 칭찬하였다.

 

지금 군이 나에게 대해 앞이라고 더한 것도 없고

뒤라고 덜한 바도 없으니,

세한 이전의 군은 칭찬할 것 없거니와,

세한 이후의 군은 또한 성인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도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도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소나무,

잣나무를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 전한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과 정당시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

모였다가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 붙였다는

글씨같은 것은 세상 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리라.

슬프다. 완당노인 씀

 

※ 발문(跋文)적공(翟公)의 고사(古事)

 

 ()나라 때에 적공이 정위(廷尉)가 되자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가 실각하자 이내 그의 대문에는

참새그물을 칠 정도로 인적이 끊기고 말았다.

그 뒤에 그가 다시 정위가 되자

또 사람들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다.

이에 그의 대문에

‘죽고 사는 갈림길에 서봐야 교정(交情)을 알게 되고,

사업에서 망하고 흥해봐야 교태를 알게 되며,

벼슬길에서 귀천(貴賤)을 겪어봐야

교정이 나타난다.

(一生一死,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熊, 一貴一賤, 交情乃見.)’라고

써 붙여 세상사람들의 염량(炎凉)세태(世態)

신랄하게 책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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