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2년 6월 20일(음력 5월 15일)
충청북도 옥천(沃川) 하계리(下桂里)에서 약상(藥商)을 경영하던
정태국(鄭泰國)과 정미하(鄭美河)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연못의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태몽을 꾸었다고 해서
아명(兒名)을 지룡(池龍)이라고 하였고,
이름도 지용(芝溶)이라고 하였다.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9세 때인 1910년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의 죽향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12세 때인 1913년 동갑인 송재숙과 결혼했다.
17세 때인 1918년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다.
휘문고보에 재학하면서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搖籃)≫을 발간하였으며,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가 무기정학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19년에 창간된 월간종합지
≪서광(瑞光)≫에 ‘3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에
시작(詩作) 활동을 하였고,
휘문고보 출신의 문우회에서 발간한
≪휘문(徽文)≫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3년 휘문고보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京都]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에 다니던 1926년 유학생 잡지인
≪학조(學潮)≫ 창간호에
‘카페 프란스’ 등 9편의 시를 발표하고,
그해에 ≪신민≫, ≪어린이≫, ≪문예시대≫ 등에
‘다알리아(Dahlia)’, ‘홍춘(紅椿)’, ‘산에서 온 새’ 등의
시(詩)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에는
휘문고보 영어과 교사로 부임하여
해방이 될 때까지 재임하였다.
1930년에는 박용철(朴龍喆), 김영랑(金永郞),
이하윤(異河潤) 등과 함께
동인지 ≪시문학≫을 발간하고,
1933년에는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김기림(金起林)ㆍ이효석(李孝石)ㆍ이종명(李鐘鳴)ㆍ
김유영(金幽影)ㆍ유치진(柳致眞)ㆍ조용만(趙容萬)ㆍ
이태준(李泰俊)ㆍ이무영(李無影) 등과 함께
9인회를 결성하며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올랐다.
또한 그해에 새로 창간된
≪가톨릭청년≫의 편집고문을 맡아
그곳에 다수의 시와 산문을 발표하였으며,
시인 이상(李箱)의 시를 소개하여
그를 문단에 등단시키기도 하였다.


34세 때인 1935년 그 동안 발표했던
시(詩)들을 묶어 첫 시집인
≪정지용 시집≫을 출간하였으며,
1939년부터는 ≪문장(文章)≫의
시 부문 추천위원이 되어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이한직(李漢稷), 박남수(朴南秀) 등을 등단시켰다.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한국어와 라틴어를 강의하였고,
≪경향신문(京鄕新聞)≫의 편집주간으로 활동했다.
1946년 2월에 사회주의 계열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의
아동분과 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그해에 시집 ≪지용시선(芝溶詩選)≫을 발간했다.
1947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시경(詩經)≫을 강의하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이화여대 교수를 사임하고
,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초당을 짓고 은거하며
≪문학독본(文學讀本)≫을 출간했다.
이듬해인 1949년 2월 ≪산문(散文)≫을 출간했으며,
6월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 결성된 뒤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했던 다른 문인들과 함께
강제로 가입되어 강연 등에 동원되기도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는
김기림(金起林). 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되었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사망 장소와 시기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데,
1953년 평양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북한에서 발행하는
≪통일신보≫는 1993년 4월에
정지용이 1950년 9월 납북 과정에서
경기도 동두천 인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발표하기도 했다.
~ 자료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정지용[鄭芝溶]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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