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옛다리를 찾아서~
수표교(水標橋)
수표교(水標橋)는
장충단(奬忠壇)공원 입구의
개천 위에 놓여 있는 다리이다.
원래는 청계2가
수표(水標)다리길 사거리에 있었으나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잠시 이전되었다가
1965년 이곳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 같은 곳의 다리에 적용되는
난간이 민간의 다리인 수표교(水標橋)에
설치된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수표교(水標橋)의 역사(歷史)
수표교(水標橋)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한 후
도시기반시설을 위한
건설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조선 초 한양은
하수시설 미비로 장마 때마다 되풀이되는
홍수 피해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를 막기 위해 태종 11년(1411)부터
세종 16년(1434)에 걸쳐
한양의 중심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개천(開川, 청계천)을 개설하여
백악·인왕·남산 등 주변의 물길을
한 군데로 모아 동대문 밖으로 흐르도록 했다.
이러한 개천의 건설로 인해
한양은 물의 범람으로 야기되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수표교(水標橋)는 이렇게 생겨난
청계천 위에 세워졌던
많은 다리 중 하나이다.



세종 2년(1420) 수표교(水標橋)가
처음 세워질 무렵에는 그 주변으로
소나 말을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다 하여
마전교(馬廛橋)라 불렸다.
그후 세종 23년(1441)
비가 올 때 수량을 측정하기 위한
양수표(量水標)를 세우는데,
이것은 강수량의 정도를 미리 알아
재난에 대비할 수 있는 방수 시설물로,
이때부터 다리 이름도
수표교(水標橋)로 기록되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수표교(水標橋)는
폭 7.5m 길이 27.5m 높이 4m이며
아홉 개씩 다섯 줄로 놓인 45개의
돌기둥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다리 두 끝의 기둥인 교대(橋臺)는
하천의 양 기슭을 이용해 돌로 쌓았고,
특히 물의 저항을 가장 많이 받는 교각(橋脚)은
저항을 줄이기 위해 네모진 석재를
모(貌)로 세워 마름모형으로 놓았다.
교각(橋脚) 위로 4.5m 길이의
멍에돌을 놓은 다음 그 사이에
귀틀석을 올리고 좌우로 돌난간을 세웠으며,
바닥에는 디딤판을 네 줄씩 깔았다.
수표교의 구조에서 특이한 것은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난간을 설치하는 것은
궁궐 등 격식을 갖춘 다리에 적용되었으므로
민간의 다리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무척 예외적인 일이다.
서쪽 시렁 측면에는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
‘丁亥改造’(정해개조) 등
개축한 해를 표시한 각자(刻字)가 남아 있다.
또한 영조가 준천공사 과정을
참관하는 모습을 담은
목판화 〈준천시사열무도〉(1760)가 남아 있다.



수표교(水標橋)의 단순한 듯
치밀한 구조로 이루어진 견고한 외형은
선조들의 뛰어난 감각과 세월이 남겨준
정취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이 다리는 오랜 세월 동안 서울 도심에서
이 땅의 사람들과 역사를 함께해온
현존하는 유일의 다리이다.
수표교(水標橋)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며,
수표석(水標石)은
1985년 8월 보물 제838호로 지정되었다.
수표석(水標石)은 현재 청량리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수표교(水標橋)는
이렇게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세워지고
수많은 풍화를 견디며
처음 세워진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또한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근대화의 과정에서 청계천의 복개와 함께
오랫동안 머물렀던 자리를 떠나야 했다.



서울 제 모습 찾기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청계천 일대 복원사업이 마무리되어도
수표교(水標橋)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장충단공원에
그대로 남는 아쉬움이 있고
오늘날 수표교(水標橋)는
이렇게 나무로 옛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2 0 1 4. 1 1. 1 4. 하 얀 머 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