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석모도

한아름 (40대공주~~) 2020. 1. 10. 12:07

석모도 여행의 재미 중 하나는 커다란 배에 차를 싣고 바다를 건너는 것일 게다. 넓디 넓은 갑판 위에 차를 세우고 아이들과 함께 선상으로 올라섰다. 차가운 겨울 바람 속으로 물거품을 일으키며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바다의 모습이 보인다. 갑갑한 도시를 떠나 탁 트인 바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 물거품을 일으키며 다가왔다 사라져가는 겨울 바다
ⓒ2005 양허용


사람들은 갈매기들에게 새우깡을 던져 주느라 정신이 없다. 인공 조미료가 들어간 새우깡은 갈매기들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데 이미 사람들이 던져주는 인공의 맛에 길들여진 갈매기들은 맛있는 별식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사람들 뒤를 열심히 따라 붙는다. 첫째 쭈니는 그런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둘째 수영이는 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해하는 눈치다.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차가운 바람 속에서 묵직하게 가라앉은 겨울 바다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나쁘지 않았건만 채 여운을 즐기기도 전에 석모도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온다. 겨우 5분 남짓한 시간이다. 그 5분의 시간이 매번 석모도로 가는 발걸음을 돌리게 하였다니….

배에서 내려 석모도 땅에 들어서는 순간, 예전에 이 길을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만삭으로 고생하는 아내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기 위해 첫째 쭈니와 단 둘이서만 여행을 떠났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 때가 둘째 수영이를 낳기 직전이었으니 벌써 다섯 해가 지난 건가. 그 때 엄마 뱃속에 있던 수영이가 이제는 저리 커서 조잘대고 있으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또 우리 부부는 늙어 버렸으리라.

섬이 가진 특권은 그 어디에서나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일 게다. 겨울을 품고 앉은 바다는어떤 모습일까? 민머루 해수욕장으로 접어드는데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염전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소금을 생산할 시기가 아니어서인지 모두 빈 염전뿐이고 소금을 만드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예전에는 제법 염전이 많은 듯하더니 두세 집을 빼고는 모두 폐허처럼 변하고 말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곳에서 소금을 만들던 사람들도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만 것일까. 그래도 이렇게 지나면서 염전을 본다는 것만으로 괜한 설렘이 느껴지는데 하나둘씩 그리운 것들이 사라지는 듯해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 천일염을 만드는 염전에도 겨울이 왔나 봅니다
ⓒ2005 양허용


염전 맞은편으로는 가을걷이를 끝낸 빈 들판에 오리 떼가 가득하다. 어디에서 날아온 것들일까. 저곳이 최종 목적지일까, 아니면 중간에 기력을 보충하기 위해 잠시 쉬어가는 것일까. 겨울철새를 보기 위해 일부러 먼 곳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오리 떼를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든다.

철 지난 민머루 해수욕장은 스산한 겨울 바람만 가득 차 있었지만 바다가 그리운 사람들로 제법 북적대고 있다. 물이 빠진 바다는 저 멀리까지 개펄을 드러내 놓은 채 싸늘함만 더하고 있다.

날씨만 그리 춥지 않다면 당장 신발을 벗고 개펄 속으로 뛰어들고 싶지만 감히 개펄에 발을 들여놓을 생각도 못하고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볼뿐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바다에 들어설 수 없는 마음. 빈 바닷가에서 갑자기 그리움이란 단어를 떠올리고 만다.

▲ 쓸쓸함으로 가득 찬 겨울 바다
ⓒ2005 양허용


▲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겨울 바다
ⓒ2005 양허용


잠시 바닷가에서 지나간 여름을 그리다가 보문사로 향했다. 낙가산 중턱에 자리한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고 한다. 강화에 오면 전등사와 함께 꼭 한 번 떠올리게 되는 곳이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으로 오르는 고갯길이 몹시 가파르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 하필이면 그 때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대는 수영이를 업고 가파른 길을 오르자니 더욱 힘이 든다. 감히 비할 것은 아니지만 불교의 깨달음을 얻는 길이 이토록 힘든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 보문사 전경
ⓒ2005 양허용


절 자체는 명성에 비해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승려의 수가 300명에 이르렀다는데 그조차도 세월 속에서 아스라한 옛 이야기가 되어 버린 모양이다. 대웅전 앞에는 동안거가 시작된다는 펼침막이 걸려 있다. 긴 긴 겨울 동안 산문 출입을 금한 채 오로지 수련에만 힘쓸 스님들이 얼마나 힘들까 하는 기우가 밀려든다.

대웅전 왼편에는 자연동굴을 이용하여 만든 법당이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불상과 22구의 나한이 모셔져 있는데 여기 얽힌 전설이 있다.

635년에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그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에 던지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려진 것은 그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러자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그것은 천축국에서 보내온 불상인데 그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기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 더 이상은 나아갈 수가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하고는 굴 안에 단을 놓고 모시게 되었다.(참조 : http://www.sukmodo.net/)


석굴 앞에는 수령이 600년이나 되었다는 향나무가 힘겨운 듯 가지를 늘어뜨린 채 서 있다. 얼기설기 지지대를 세워 놓은 것으로 보아서 보수 작업이 진행 중인 모양이다. 늘 한 자리에 서서 기쁨도 슬픔도 모르고 묵묵히 자리를 지킬 것 같은 나무조차도 세월 앞에서는 저렇게 힘들어하니 시간만큼 강한 것이 또 있으랴.

▲ 보문사 대웅전
ⓒ2005 양허용


법당 뒷편으로는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보문사만의 또 하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낙가산 눈썹바위를 조각해서 만든 9m 높이의 마애불이다.

잠이 든 수영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쭈니만 데리고 마애석불로 오르는 돌계단을 힘들게 걸어 올랐다. 일주문에서 법당으로 이르는 길도 그리 가파르더니 이 길 역시 가파르고 힘들다. 단번에 쉽게 오르지 못하도록 가파른 길을 낸 이유는 아마도 한걸음 한걸음 오를 때마다 부처님의 깊은 은덕을 되새겨 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어른이 오르기에도 힘든 길이니 쭈니에게는 더 큰 무리였는지 모른다. 그만 올라가자는 아이를 살살 달래며 15분여를 힘들게 걸어 올라가니 위압감을 느낄만한 크기의 불상이 눈 앞에 나타난다.

▲ 낙가산 눈썹바위 밑에 조각된 9미터 높이의 마애불
ⓒ2005 양허용


이 불상은 보문사 주지였던 배선주 주지스님이 금강산 표훈사 주지였던 이화응 스님과 1928년에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진심으로 기도를 올리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나 불자가 아니니 기도 대신 가벼운 목례로 대신하고 말았다.

이곳이 관음도량의 성지임을 알리기 위해 이 험한 곳에 이렇게 거대한 불상을 조각했다고 하나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부처님의 자비를 베풀기 위한 뜻이 담겨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대한 마애불을 등지고 서니 나뭇가지 사이로 서해 바다의 모습이 시원스레 펼쳐진다. 장관이다. 저 멀리 서쪽 하늘로 태양이라도 저물어간다면 그보다 더한 황홀경이 없을 듯하다. 서해의 3대 낙조 중 하나라는 명성이 분명 틀리지 않을 법하다.

▲ 서해 바다로 짧은 겨울 해가 넘어 갑니다
ⓒ2005 양허용


돌아가는 배 시간에 맞추기 위해 서둘러 항구로 돌아오며 짧은 석모도 나들이를 마감했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늘 섬이라는 이유 때문에, 배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건널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번번이 발길을 돌렸던 섬 석모도. 언젠가는 그곳의 낙조를 볼 수 있도록 여유 있는 나들이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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