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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둔황, 혜초 스님의 영혼이 깃든 모래 도시 (이태훈)

한아름 (40대공주~~) 2018. 9. 4. 11:35

 

 

 

  둔황, 혜초 스님의 영혼이 깃든 모래 도시

 

  [글ㆍ사진 = 이태훈 여행 칼럼니스트]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프랑스 파리 박물관 소유)’이 전시되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우리 한민족의 영혼이 깃든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스님이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신라를 떠나 중국에 들어간 뒤 열아홉에 인도를 거쳐 서역 페르시아까지 장장 2만㎞를 여행한 도전정신의 산물이다.

 

  아스라한 전설과 신화로 내려오던 혜초 스님의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은 1908년 3월 프랑스 출신의 고고학자 펠리오가 중국 둔황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한 것이다. 727년에 완성된 왕오천축국전은 혜초 스님이 배를 타고 인도로 건너간 뒤 수년 간 여행을 끝마치고 카라코람 산맥과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중국 간쑤성 서부에 위치한 사막의 오아시스 둔황에 남겨진 채로 모래 속에 천 년 간 묻혀 있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도시, 둔황은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서 인류사에 가장 중요한 대상무역도시로 알려져 있다.

 

  둔황은 실크로드 관문에 위치한다는 지정학적 이유 때문에 한나라가 기원전 3세기에 이곳을 처음으로 점령하였다. 기원전 111년에는 한 무제가 정식으로 군대를 파견해 북쪽에서 내려오는 몽골족의 침략을 막고, 중국의 비단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까지 수출하는 데 새로운 길을 열면서 둔황이 그 중심에 서게 되었다. 타림분지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을 지나던 실크로드의 두 갈래는 둔황에서 시작된다. 투루판이 있는 북로와 호탄이 있는 남로로 가기 위해서는 서안에서 출발한 실크로드는 반드시 둔황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야만 했다. 반대로 타림분지의 사막을 통과한 상인들은 타는 목마름을 달래고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 둔황에 머물며 서안으로 갈 준비를 하였다. 따라서 예로부터 둔황은 중국 통치영역으로 편입되면서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에서 중요한 대상도시이자 상업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런 지리적 이점 때문에 동서양의 무역 중심지로 급부상한 둔황은 중국의 왕조가 바뀔 때마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야만 했다.

 

  4세기 이후 한나라가 급속하게 쇠락해지자 간쑤성을 중심으로 후량, 북량, 서량 등의 통치를 받기 시작했고, 그 뒤로 북위와 서위 그리고 수나라에 지배를 받았다. 또한 지금의 티베트라고 불리는 토번 왕국이 8~9세기에 걸쳐 50년 간 둔황을 지배했고,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인 원나라,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 위구르족 등이 사막의 오아시스인 둔황을 차례로 점령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처럼 수많은 중국의 왕조와 여러 민족이 거쳐 가면서 둔황은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동서양의 다양한 문화가 서로 만나는 도시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둔황은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 중국의 도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등 여러 종교가 서로 어울려 아주 이색적인 종교의 도시로 발전했다. 특히 366년 천불동이라 불리는 곳에 수많은 석굴사원을 처음으로 건축해, 둔황이 불교중심지로서 동서양의 순례자들에게 각광받는 순례지가 되었다. 이때 대부분의 승려들은 중국의 한족이 아닌 중앙아시아나 페르시아 그리고 토번 왕국의 티베트인들이었다. 거기에는 신라 출신의 혜초 스님도 둔황에 머물며 불교 중심지로 성장하는 데 한몫을 했다.

 

  고색창연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둔황은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과거의 명성만큼 영화로움을 누리지 못했지만 당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크게 번성한다’라는 뜻의 도시 이름처럼 실크로드 도시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고 부와 명예를 오랫동안 누린 도시로 유명했다. 지금은 인구 18만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로 전락했지만 도시 곳곳에는 유구한 역사가 살아 숨쉰다.

 

  △가는 길=실크로드 중심도시 둔황까지 가는 길은 조금 멀고 험난하다. 우리나라에서 직항편이 없는 탓에 중국의 서안이나 베이징까지 간 다음, 국내선을 이용해 둔황 공황으로 가면된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13㎞. 베이징에서 둔황까지 비행기로 5시간, 서안에서 2시간 소요.

 

  △현지 교통=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막고굴은 둔황시내에서 동남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있다. 버스로 30분 소요되고, 택시를 타고 이동하거나 서역빈관 앞이나 둔황반점 부근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보다 둔황을 효과적으로 둘러보기 위해서는 호텔이나 현지 여행사에서 운영하는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 편리하다. 대중교통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투어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둔황을 쉽게 여행할 수 있다.

 

  ■ ‘둔황예술’의 극치를 엿보다

 

  막고굴 

 

  당나라 시대 때 화려하게 꽃을 피운 ‘둔황예술’의 극치와 고비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로서의 명성을 보고 느끼기 위해 해마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둔황을 찾는다.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둔황 막고굴의 불교미술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과거 대상인들이 사막을 건너가기 전에 자신들의 무사 안녕을 바라며 부처님에게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부유한 상인들이 많은 돈을 사원에 기부한 결과, 그것을 바탕으로 석굴에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희귀한 벽화와 불상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막고굴 입구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수많은 석굴 중에서 발견된 것이다. 불교미술의 꽃으로 불리는 `둔황 막고굴`은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의 화려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승려, 상인, 병사 등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저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를 이곳으로 가져왔는데 인도에서 온 불교는 둔황에서 찬란하게 꽃을 피우게 된다.

 

  일명 ‘둔황예술’은 파키스탄의 간다라 미술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불교미술의 전시장이다. 366년 승려 악준이 명사산과 삼위산에서 이상한 빛이 있음을 알고 석벽을 파서 굴을 만들면서 막고굴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천년 동안 수많은 승려와 조각가, 화가, 석공 등이 둔황을 찾아와 하나 둘씩 굴을 파고 불상을 들이고 벽화를 그리면서 크고 작은 굴이 생겨났다.

 

  굴의 전체 수가 대략 천여 개 된다고 해서 막고굴을 ‘천불동’이라고 부른다. 동굴 내부에는 부처님과 저마다 다르게 그려진 불화가 동굴 천장과 벽을 장식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북위시대(386~534)와 당대(618~907), 그리고 5왕조시대(907~960) 때 만들어진 것이다. 막고굴이 발견된 후부터 불행하게도 벽화들은 햇빛에 노출되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검게 변화되거나 채색이 없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 당시 수준으로 봤을 때 벽화와 불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하고 아름답다. 한마디로 불교미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여행지 둔황. 이곳에 서면 과거 실크로드 시대의 영화로움과 찬란한 불교미술 그리고 혜초 스님의 강한 도전정신이 그대로 느껴진다.

 

 

  혜초는 누구인가? (위키백과에서)

 

  혜초의 생애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미궁 속에 빠져 있다가 근세에 와서야 비로소 그 대략적인 면모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지난 세기 초 그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오늘날까지 그의 생애는 약력 정도만 그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719년(성덕왕 18) 남인도의 밀교승(密敎僧) 금강지(金剛智)에게 불도를 배웠다. 바닷길로 인도에 이르러 사대령탑(四大靈塔) 등의 모든 성적(聖蹟)을 순례하고, 오천축국(五天竺國) 등 40여 개국을 거쳐 727년(성덕왕 26) 당나라 장안(長安)에 돌아왔다. 여기서 기행문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3권을 지었으나 전하지 않았는데 1906~1909년 사이에 프랑스의 학자 폴 펠리오(Pelliot)가 중국 간쑤 성 지방을 탐사하다가 둔황 석굴에서 구매한 앞뒤가 떨어진 책 2권을 발견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사학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우선 혜초의 고국은 여행기가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년에 처음으로 일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 의해 밝혀졌다. 그 전에는 다만 그가 밀교승으로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 삼장의 제자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의 국적은 미지로 남아 있었다. 다카쿠스 준지로는 당대 밀교 최성기의 중요 문헌인 원조(圓照)의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代宗朝贈司空大瓣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속에 수록되어 있는 사료를 인용하여, 혜초는 신라인으로서 유년기에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 밀종(密宗)의 시조인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 삼장을 사사하고 불경의 한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고증하였다. 혜초는 여행을 마치고 787년까지 중국의 오대산(五臺山, 3058미터) 금강지 대공삼장(大空三藏)의 역장(譯場)에서 54년 동안 지내면서 많은 불경을 번역하였다.

 

 

  다시 길 떠나는 그대

 혜초의 길 61

 

  하늘 아래 영원한 것 없더라도

  그대 꿈꾼 것은 영원이 아니었던가

  영원히 이어갈 부처의 말씀

  영원히 이어갈 길들의 종교

 

  그대 걸어갔던 그 길

  지금은 잡풀만 무성해도

  그때 그곳으로 사람이 걸어갔었다

  사람을 불쌍히 여겼던 사람이

  사람이 걸어간 길을 사랑했던 한 사람이

 

  가보지 않았는데 어찌 길이라 할 수 있으리

  그대 땀으로 썼던 두루마리 족자 하나

  천년이 넘는 시간의 길 묵묵히 걸어왔으니

  하늘 아래 영원한 것도 있구나

 

  그대 살아생전에 만났던 사람 다 죽고 없지만

  그들은 모두 길 되어 있으리

  그들이 길 되었음을 그대 기록하였기에

  나 이제 집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혜초여

 

  ㅡ『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혜초의 길』 (서정시학, 2010)에서

 

 

 


 
출처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글쓴이 : 이승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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