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도시 파리를 빛낸
에펠탑
“파리는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다. 적어도 여기에서처럼 한꺼번에 많은 세상을 볼 수 있는 곳은 없다. 모든 것을 다 파악해서 그걸 쓸모 있게 사용해보았으면 하는 사람들을 절망시키기에 충분한 곳이다.”
이처럼 파리를 적절하게 표현한 글은 없다. 파리는 서양 문화의 많은 유산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활기찬 삶을 화려하게 보여준다. 파리 곳곳에는 역사적인 현장들이 자리하고 있다. 파리 탄생과 함께해온 생루이섬이나 시테섬 같은 곳에는 이미 2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12세기 건설된 노트르담성당, 200년 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기 직전까지 수감되었던 콩시에르주리(Conciergerie), 콩코르드광장의 오벨리스크 등은 관광객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40만 점의 작품이 소장된 루브르박물관 · 오르세미술관 · 퐁피두미술관 등에서는 인류의 문명과 역사의 과거와 현재를 엿볼 수 있는 원작들이 관람객들을 즐겁게 한다.
파리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었지만 현대적인 모습이 갖춰진 것은 나폴레옹 1세(Napoléon I, 1769~1821)와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1808~1873)의 도시 개축 작업에 힘입은 바가 크다. 나폴레옹 1세는 마들렌성당을 건설하고 콩코르드광장을 재정비했으며 혁명의 상징인 바스티유와 에투알광장을 연결했다. 그리고 1805년 오스테를리츠 전투에서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개선문 공사를 시작했다.
나폴레옹 1세가 파리에 선명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생명을 불어 넣은 사람은 나폴레옹 3세이다. 1850년대 나폴레옹 3세는 조르주 오스만 남작의 설계를 받아들여 파리시를 전면적으로 재단장하기로 했다. 이때 생미셀 대로에서 세바스토폴 대로에 이르는 도로가 닦였고 시테섬의 건물들이 재건축되었으며 샤틀레광장의 모습도 바뀌었다. 특히 도시 전체를 조그만 구로 나눠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주요 간선도로들이 도시를 관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리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은 1855년부터 거의 11년마다 한 번씩 열린 세계박람회 때문이다. 파리세계박람회는 파리의 이미지를 완전히 다르게 변모시켰다. 박람회 때마다 새로운 궁전이 지어졌고 도시구획이 정비되었다. 센강 북쪽 강변에 에펠탑을 바라보고 서 있는 샤요궁전은 1878년 박람회 때 건설되었고 1937년 박람회 때는 샤요궁전의 동쪽에 시립근대미술관이, 서쪽에 국립자연사박물관이 세워졌다.
그런데 1889년 세계박람회는 구설수에 휘말렸다.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대혁명 100주년과 세계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대형 철탑을 건설하겠다고 하면서 높이 300미터에 달하는 대형 철탑이 프랑스의 국력과 발달된 토목기술을 세계에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기념비라고 발표했기 때문이다.(19세기에 철은 최첨단 건축자재였다. 런던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선보인 수정궁전은 유리와 철로 만들어졌는데 세계인들을 환상의 세계로 몰아갔다. 당시 철은 경제적 · 정치적 진보와 동의어였다) 그러나 많은 프랑스인들은 이 철로 만든 괴물이 고풍스럽고 조화로운 파리 풍경을 훼손시킬 것이 틀림없다고 항의했다.
대형 철탑 건설계획은 몇 명의 선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881년 토목기사 세빌로가 300미터짜리 탑의 건설계획을 가지고 미국에서 돌아왔다. 돌로 만든 태양탑 형태에 거대한 서치라이트를 부착해 밤의 파리를 비춘다는 생각이었다. 1884년에는 에펠사의 토목기사 모리스 케클랭(Maurice Koechlin)과 에밀 누기에(Emile Nouguier)가 300미터 높이의 탑을 설계하기 시작했다.(이 두 사람은 자유의 여신상 구조물을 계산했다) 이때는 1889년의 세계박람회 개최가 아직 결정되기 전이었다. 그런데 당대 최고의 건축토목가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32~1923)이 케클렝의 아이디어를 접하게 되었다.
에펠은 파리의 에꼴 폴리테크닉(Ecole Polytechnique)에서 화학을 공부했고 화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나 화학공장을 경영하던 숙부가 세상을 뜨면서 그의 꿈도 함께 사라졌다. 에꼴 폴리테크닉 졸업 후 그는 금속가공 공장에 취직했고 우여곡절 끝에 건축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그런데 철도시설 제조기사 샤를 누보를 만나면서 그의 일생은 획기적으로 변했다.
에펠은 누보에게 강물 속에 건설하는 기초공사를 배웠는데 누보는 에펠의 능력을 인정해 에펠이 서부철도회사로 옮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철도회사에서 에펠은 주철과 철판으로 만드는 22미터짜리 다리 설계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 후 누보의 주선으로 차량철도설비 제조회사로 옮긴 에펠은 1857년 높이 25미터에 이르는 여섯 개의 교각과 길이 500미터짜리 철제 주형(Girder)으로 놓는 보르도 철교 건설공사를 지휘 · 감독했다. 그때까지 건설현장 경험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사를 훌륭히 해냄으로써 그는 토목건축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명성을 쌓았다.
1866년 그는 에펠사를 설립했다. 에펠사는 1875년 헝가리 페스트역과 포르투갈 도루강의 대규모 교량공사를 수주한 이후 고난도의 대규모 공사를 계속 진행하면서 국제적인 건설업체로 도약했다. 1880년대 중반에는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 내부 받침 골조, 지중해의 니스천문대 돔을 성공적으로 작업했다.
에펠은 케클랭의 아이디어를 접하자마자 회사 소속 건축가 스티븐 소베스트르에게 스케치를 현실화될 수 있도록 손질하라고 지시했다. 감각이 있던 소베스트르는 케클랭의 아이디어를 시공 가능한 ‘건축물’ 설계로 변형시켰다. 그의 설계는 파리의 공예전시회에서 첫선을 보였고 에펠은 케클랭과 누기에와 공동으로 특허등록을 했다. 특허명은 ‘300미터 이상 높이 탑의 금속 받침기둥과 금속 탑문(塔門)을 세울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다.
1884년 프랑스 정부는 1889년 파리세계박람회 개최를 발표했고 박람회를 위한 건축 공모전을 열었다. 19세기의 기술적 진보와 산업 발전을 인상적으로 상징할 기념물을 표현해줄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공모 조건은 에펠을 위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에펠은 공동 특허제출자인 케클랭과 누기에에게 약간의 금액을 지불하고 권리를 사들인 뒤 공모에 응했다. 공모에 제출된 700개의 설계도 중 에펠의 아이디어가 단연 압도적이었고 공모에 당선되었다. 그는 곧바로 대형 철탑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박람회를 위해 시꺼먼 철탑을 세운다고 하자 파리 사람들은 예술의 도시 파리를 망가뜨린다며 에펠에게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5~6층 높이의 낮은 석조건물에 익숙한 파리 사람들에게 철로 만든 괴물은 노트르담대성당에 대한 수치, 고전주의 법칙과의 비극적인 단절, 건축 예술에 대한 죄악이었다. 에펠은 수많은 건축가 · 예술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진행했다.
에펠의 설계를 검토한 한 수학교수는 에펠의 설계도대로라면 탑이 200미터 높이에 이르면 붕괴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철탑의 무게를 어떻게 지지하느냐가 가장 힘든 문제였다. 에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크리트에 기초한 네 개의 철각 위에 탑을 얹어놓는 구조를 생각해냈다. 동쪽과 남쪽의 철각 기초에는 길이 10미터 · 폭 6미터 · 두께 2미터, 북쪽과 서쪽의 철각 기초에는 길이 15미터 · 폭 6미터 · 두께 6미터의 대형 콘크리트를 기초로 삼았다.
에펠은 조립식 교량 건설의 노하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이 겪은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았다. 구조물이 바람과 같은 응용력 때문에 받게 되는 힘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펠탑의 구조는 엄밀한 구조계산 덕분에 시속 180킬로미터의 바람을 받을 때에도 맨 꼭대기가 흔들리는 폭이 불과 12센티미터에 불과하다. 아무리 강한 바람에도 에펠탑은 기울어질 염려가 없다.
에펠은 모든 재료를 외부에서 제작해 와 현장에서 조립했다. 탑에는 1만 5000개의 강철 조각과 105만 846개의 못이 사용되었고 총 7300톤의 철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에펠탑은 높이에 비해 무게가 매우 가볍다. 총 무게가 7300톤으로 쇳덩이로 치면 9입방미터의 무게에 해당한다. 에펠탑의 기단과 같은 둘레에 높이가 300미터인 공기 실린더보다도 가벼운 무게이다.
1889년 5월 15일 세계박람회 일정에 정확하게 맞춰 에펠탑이 완성되었다. 에펠탑은 예상보다 적은 인부(300명)와 짧은 건설 기간(2년 6개월)을 들인 토목공학의 계가였을 뿐만 아니라 에펠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공사비는 당초 예상보다 2.5배 초과했지만 재정적으로 대성공이었다. 에펠은 탑이 무너질 경우 사비로 보상하겠다고 프랑스 정부에 약속한 후에야 건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에펠에게 150만 프랑(전체 건축 비용의 약 20퍼센트)을 지불하는 대신 1910년까지 이 탑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물론 공사비는 박람회 기간 중에 회수할 수 있었다. 그 후 계약은 70년이나 연장되었다.
당시까지 에펠탑처럼 높은 건축물이 세워진 적은 없었다.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홈보험빌딩은 55미터였으며 파리의 노트르담대성당은 66미터, 로마의 베드로대성당은 132.5미터에 불과했다. 세 군데에 전망 테라스가 있는 에펠탑은 박람회에서 최고의 인기를 끌었고 200만 명이 에펠탑에 몰렸다. 파리를 망가뜨린다는 비난은 탑이 완성되자 찬사로 바뀌었다. 발명왕 에디슨은 에펠탑을 ‘위대한 아이디어의 현장’이라고 극찬했다. 에펠은 이렇게 선언했다. “프랑스는 국기가 300미터의 깃대 위에서 펄럭이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에펠탑은 19세기 기술의 승리이자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기둥받침대 · 기둥몸통 · 기둥머리 등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고대로부터 줄기차게 건축에 적용된 규범은 새로운 아이디어에 의해 설 자리를 잃었다.
에펠탑은 20년 동안 한시적으로 세워질 계획이었기 때문에 1909년 해체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마침 발명된 마르코이의 무선전신을 위한 안테나로 탑을 이용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고 에펠탑에서 팡테옹까지의 무선전신을 위해 해체는 중지되었다. 이후 에펠탑을 통해 1916년 처음으로 대서양 너머로 무선통신을 내보냈고 1921년 라디오 방송이 이뤄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16미터짜리 텔레비전 안테나가 추가되어 탑의 높이는 324미터가 되었다. 현재도 텔레비전의 송신탑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5년에는 회전식 표지등이 설치되었고 1988년에는 나트륨전구를 이용한 조명시설이 갖추어져 파리의 밤을 밝히고 있다. 모험가들은 에펠탑 정상에서 번지점프를 즐기고 곡예사들은 아슬아슬한 연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에펠탑에는 전망대가 세 곳 있는데 지상 57미터에 제1전망대, 115미터에 제2전망대, 274미터에 제3전망대가 있다. 엘리베이터가 운행되지만 제2전망대까지는 걸어서 올라갈 수 있다. 제2전망대 전광판에는 누적 입장객 숫자가 표시되는데 2002년 2억 명을 돌파했다.
에펠탑을 끝까지 반대한 사람도 있다. 그중 한 명이 소설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3)이다. 그는 에펠탑을 너무 싫어했지만 에펠탑 1층에 있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매일 저녁식사를 했다. 왜 에펠탑 안에 있는 식당을 찾느냐고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냉소적으로 이렇게 답했다. “파리에서 그 빌어먹을 것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이 그 안에 있는 식당이기 때문이다.”
에펠탑처럼 설계 단계에서부터 구설수에 휘말리고 수많은 반대에 부딪친 건축물은 별로 없다. 또한 건설되자마자 세계로부터 찬탄을 받은 건축물도 거의 없다. 에펠탑은 계속 보수를 거듭하면서 13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지구촌 사람들이 파리를 방문할 때 반드시 들르는 명소가 되었다. 1980년 그동안 에펠사가 갖고 있던 에펠탑 운용권을 파리시가 인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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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텔스만, 2003,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생각의나무, 2006
- 《클락시커 50 서양건축》, 롤프 H. 요한젠, 해냄, 2004
- 《파리》, 시공사, 2007
- 《세상을 바꾼 건축》, 클라우스 라이홀트 외, 예담, 2006
글
출처
인간의 열정이 남긴 불멸의 흔적을 따라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여행을 떠난다! 필론이 선택한 세계 7대 불가사의부터 최근 선정된 세계 신 7대 불가사의, 그리고 그 후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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