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ul Cezanne French Painter Post Impressionism 1839.1.19 ~ 1906.10.22
Leda with Swan 1880-82 Oil on canvas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Philadelphia PA USA
“만일 사람들이 세잔느를 제대로 이해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유행을 추종하는 속물들을 좀 덜 구경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이 예술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현재의 암흑일 뿐이다. 그들은 좀 더 진실하고, 겸손하며, 성실한 화가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맡은 임무의 어려움을 깨닫고 스스로의 파렴치함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만일 객관적 진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예전의 위대한 화가들에게로 되돌아가는 일이 가능해진다면, 그것은 세잔느의 영향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또한 그렇게 되면 그가 언제나 되 뇌이고 했던 말이 성취되리라.
“우리는 자연을 통해 다시 고전주의자가 되어야 하네.”
세잔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보다 깊이 있는 삶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놓여 진 하나의 가교일 것이다.”
화가이자 전기 작가인 에밀 배르나르의 <세잔느의 회상> 중에서.
대중들에게 단순히 20세기 ‘입체파의 선구자’라는 정도의 피상적 지식만으로 알려져 있는 세잔느를, 그의 열렬한 찬미자였던 화가 베르나르는 세잔느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904년, 평소 흠모하던 세잔느를 충동적으로 찾아가 아예 액상 프로방스에 집을 구하고 약 한 달 간 거의 매일 왕래하며 같이 지냈다. 그리고 펴낸 책이 <세잔느의 회상>이다. <고난의 지성에게 바치는 찬미가>라는 부제목이 붙여졌다.
Table Corner 1895-1900 Oil on canvas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Philadelphia PA USA
“천재 세잔은 그림의 전체적 구도를 재배열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전체로서의 그림을 보면 원근법의 왜곡이 더 이상 왜곡되어 보이지 않도록 했다. 오히려 그림이 하나의 정서적 비전을 획득하여, 새로운 질서가 그 안에서 탄생하고 그림 속의 사물은 지금 막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 한 데로 집결하는 듯한 느낌을 주도록 그렸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프랑스 철학자-
테이블과 그 테이블 위에 놓인 과일이 담긴 접시와 그 과일들 모두가 보는 시점이 각기 다르지만 그 소재들의 실재감과 형태감을 완벽하게 표현한 세잔만의 새로운 질서를 창출한 것이다.
The Avenue of chestnut trees at Jas de Bouffan 1871 Oil on canvas 37 x 44 cm Tate Gallery London UK
거침없는 힘찬 붓질의 초기 그림이다. 싱그러운 기운으로 가득한 짙게 드리운 검푸른 그늘. 그 아래 앉으면 세상 번뇌 모두 사라질 것만 같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이다.
The Hanged Man's House at Auvers 1873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세잔이 파리로 옮겨와서 부터는 인상주의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빛의 방향과 반사에 대한 수많은 관찰과 연구를 진행하면서도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관찰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인상파의 방식에 만족하지 않았다. 세잔은 사물의 순간적인 변화보다는 사물의 변하지 않는 그 본질을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가장 유명한 그림 즉 <오베르의 목맨 사람의 집>은 이러한 특징들을 뚜렷하게 나타내고 있다.
The Abduction 1867 Oil on canvas 117 x 90.5 cm Keins Collection
엑상프로방스 출신인 세잔이 파리의 도시 생활과 아방가르드 미술에 적응하면서 세잔이 그린 초창기의 그림들은 어두운 그림들로 폭력적이고 강열하고 낭만적인 범주의 주제들이 대부분이다.
세잔이 제작한 이 시기의 작품들인 <납치(The Abduction)>, <살인(A Murder)> 등 에서는 인간 특히 여성을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
La Montagne Saint Victoire 1885-95 Oil on canvas 71.8 x 91.7 cm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USA
세잔의 그림의 특징은 집요하게 한 가지 모티브에 집중하여 그리므로 하여 지속적으로 실험한 기법의 정수를 보여주는 연작으로 탄생한다. 이 연작의 주는 중요성은 서로 다른 각도에 맞춰서 다양한 생 빅투아르 산의 모습을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0여개가 넘는 이 작품들은 자연의 풍경을 담은 것이라기보다, 그 대상에 대한 분석을 낱낱이 재현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Three Bathers 1875-77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자신을 둘러싼 여자들이 모두 그를 유혹하려 호시탐탐 노린다는 성적 강박관념에 평생 시달렸던 세잔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누드모델을 쓰지 않고 상상만으로 <대 수욕도> 시리즈 등의 많은 누드화를 그렸다.
A Modern Olympia 1869-70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흰 침대보 위에서 모던 올랭피아는 자신을 방어하듯 몸을 움츠리고 있고 오른쪽 위의 커튼이 연극적이고 드라마틱한 효과를 준다. 이후 인상주의 화풍의 스케치 풍으로 제작된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모던 올랭피아>보다 더욱 강열한 에로틱한 분위기의 심리효과를 보여준다.
A Modern Olympia 1873-1874 Oil on canvas 46 x 55.5 cm Musee d'Oreay Paris France
1974년 살롱 전에서 외면 받던 일군의 젊은 화가들은 사진가 니다르의 스튜디오에서 그룹전을 열었다. 여기에는 모네, 드가, 피사로 르누아르, 노리소, 시슬리 그리고 세잔느 등 무려 30여명의 화가들이 작품을 내놓았던 대규모 그룹전으로이것이 역사적인 제 1회 인상주의전이다. 세잔느는 동료화가들 조차 너무 그림이 선정적이라 관객들에게 혐오감을 줄 수 있어 빼야한다고 했을 정도였지만 몇 몇 주요화가들이 강력히 추진하여 전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현대판 올랭피아>와 <오베르의 목매 죽은 사람의 집>등 3점을 내놓았다.
고급 매춘부인 여인은 하인이 이불을 걷어 손님 앞에서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그림이다. 손님으로 등장하는 뒷모습은 세잔느 자신의 뒷모습으로, 세잔의 숨겨진 관음증 적이고 현실적으로 대면할 수없는 여성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다룬다. 이 그림은 당시 많은 비평가들에 의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카데믹한 그림에 익숙해 있던 비평가들은 이들을 정신이 제대로 되지 못한 사람이며 예술의 이론이 전혀 없는 사람들로 몰아 세웠다.
“차라리 인상파라고 하라.”
특히 르루아라는 비평가가 냉소적인 말로 내뱉었던 말을 이들은 흔쾌히 받아들여 자신들의 그룹 이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게 해서 인상주의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Girl at the Piano (Overture to Tannhäuser) Portrait of the Artist's Sister and Mother 1868 - 1869 Oil on canvas 57 x 89 cm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세잔은 음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코넷이라는 악기도 잘 불었으며 특히 바그너를 대단히 좋아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지나치게 혁명적인 형식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좋아하지 않아 공연 도중 야유로 중단되었을 정도였지만 세잔은 예외였다. 그는 피아노 치는 여동생의 모습을 그렸는데 제목이 ‘피아노를 치는 소녀-탄호이저 서곡’이다. 바그너가 작곡한...
Five Bathers 1885-87 Oil on canvas Kunstmuseum Basel Basel Switzerland
누드라 할지라도 섹슈얼리티를 모호하게 처리한 여성들의 이미지, <목욕하는 사람들>이라는 소재를 화폭에 표현하고 있지만, 실은 이런 주제의식과 전혀 무관한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즉 고도의 추상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세잔이전의 작품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사실적인 전통기법과 단절한다는 모더니즘 미학의 핵심이 여기에서 화려하게 시작된다. 아무런 장식성도 없고 그림을 이해 할 수 있는 어떤 암시도 없이 단순히 제목과 화폭에 펼쳐진 이미지만이 그림을 대변하고 있다. 과연 세잔느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큐비즘(Cubisme)은 세잔 미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말년의 작품 대부분에서 볼 수 있는 이 기법은, 사물의 형태를 복수의 시점에서 보는 구도상의 연구와 어우러져, 입체파와 추상미술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는 이 작품을 본떠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렸다.
A Murder 1870 Oil on canvas 90 x 65 cm Walker Art Gallery Liverpool England
문학, 예술 활동이 매우 활발했던 1860년대 초 파리의 미술 아카데미에서 매년 열리는 전람회에서는 전통적인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 양식을 따르지 않는 그림들을 거절해왔다. 이 때문에 작가들의 반발이 일자 나폴레옹 3세는 1863년에 낙선한 작가들의 전시물로 낙선 전(살롱 데 르퓌제; Salon de Refuses)을 개최하도록 했다.
세잔은 바로 이 낙선 전을 통해 처음 전시를 할 수 있었고 인상주의 작품들이 포함된 낙선전은 가히 혁명적이라 여겨졌으나, 비평가들의 반응은 비난 일색이었다. 이 시기 세잔의 작품은 어둡고 폭력적이고 무거운 색조가 주를 이룬다. <옷입는 여인>, <납치(The Abduction)>, <살인(A Murder)>, 등이 이 시기의 작품으로, 세잔 초기의 작품에서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
Dr. Gachet's House at Auvers 1873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가셰 박사.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하면서 정신병원의 전문 의사였던 가셰 박사는 반 고흐가 자살로 삶을 마감하기 전에 가셰 박사가 살고 있는 오베르 우아즈로 찾아가 이웃에서 살면서 가까운 친구로도 많이 의지하였던 반 고흐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Paul Alexis Reading to Emile Zola 1869-70 Oil on canvas Museum de Arte de Sao Paolo Assis Chateaubriand Sao Paolo Brazil
세잔은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에 있는 콜레주 부르봉(중등과정)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몸이 약하고 지독한 근시의 동급생을 만난다. 그 소년은 친구들에게 늘 놀림과 괴롭힘을 당했는데. 그때마다 동급생보다 힘이 세고 덩치가 큰 세잔이 그를 도와주곤 했다. 그 소년이 대 문호 에밀 졸라이다. 이들은 이렇게 우정을 다지게 되었는데 그 우정은 약 30여 년간 지속되었다.
Still-life with Apples (Nature morte Les Pommes) 1890 Oil on canvas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나는 사과 한 알로 파리를 정복할 것이다.”
사과로 발견한 회화의 질서. 큐비즘의 선구자이자 색채의 마술사인 세잔이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되겠다는 세잔은, 파리에서 작품에 대한 비웃음과 악평을 뒤로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물화게 몰두했다. 세잔은 정물을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찾고자 했으며 색채 또한 과일의 색조가 서로 보색을 이루도록 배치하여 자신이 원하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사과를 모든 각도에 놓고 바라보면서 최고의 위치를 찾아내는 작업을 지속했다. 세잔의 그림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인해 후배 화가들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여 결국 말한 대로 파리를 정복했으며 후기인상파의 대표적 거장으로 불리는 오늘 날이다.
Still Life with Plaster Cupid 1895 Oil on canvas 27.5 x 22.2 inch Courtauld Institute of Art London England
1895년 세잔의 <Still Life with Plaster Cupid>작품의 큐피드의 조각이 아직도 화실의 장식장 위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사진에 보이듯 세잔이 정물화에 이용하던 생활 용품들은 특별한 것도 아닌 어느 곳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이 아틀리에는 세잔이 1902년 직접 설계한 것으로 1906년 사망할 때까지 작업하던 상태 그대로를 보전하고 있다. 세잔의 아틀리에의 외부사진인데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곳에 있었는데 이층은 예전의 화실 모습 그대로 보전되어 개방하고 아래층은 기념품 상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관람자들의 생각 나름이겠지. 별 것 아니라는 분들도 있게 마련이니까.. 건물 전체를 찍을 수가 없어 아쉬웠지만 역사를 자랑하는 아름드리 소나무며 울창한 숲속에서 세잔이 혼자 외로이 그림에만 몰두하며 말년을 보냈던 곳이라 생각하니 모든 것이 새로운 기운으로 살아나 얼마나 설레며 쫒아 다녔는지..!
Le Festin (The Banquet) 1870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Still Life with Soup Tureen 1877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The tall trees at Jas de Bouffan 1871 Oil on canvas
큐비즘의 선구자이자 색채의 마술사
“지난 20년간 미술계에서 벌어진 모든 것의 출발점은 세잔이라는 사실을 시인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해결점도 그에게서 찾아야 한다. 우리들 주위에 가장 독창적인 예술혼을 지니고 있는 화가들은 그의 가장 은밀한 의도를 다시금 시도하여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앙드레 로트 (프랑스 입체파 화가) 회화 그 혼과 정신, 1920
Boy in a Red Waistcoat 1888-1890 Oil on canvas Foundation E.G Bührle collection Zurich Switzerland
세잔이 50세경에 그린 유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원근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소년의 팔을 보면 오른팔이 매우 길게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소년의 갈등과 같은 사람묘사를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세잔은 어떤 것을 고집스럽게 그렸다. 정물을 그릴 때도 그랬고 인물화를 그릴 때도 무려 150번씩이나 앉혀 놓았다고 한다. 자연의 끝없는 탐구와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그는 캔버스에 진정한 회화를 그리고자 평생을 바쳤다.
Afternoon in Naples (Rum Punch) 1876-1877
이국 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남성과 여성의 인체는 과도하게 왜곡 처리된다. 이러한 주제는 성에 대한 작가의 환상이라기보다 살롱에서 수용되던 주제를 비판하는 행위이자, 사회적 도덕성에 대한 비판의 논조를 띤 내러티브로 수용되었고, 이를 위해 살롱 전에 출품했으나 낙선되었다.
Vase with Flowers. Chrysanthemums 1900 Oil on canvas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Philadelphia PA USA
Portrait of Mme Cézanne 1885-87 Oil on Canvas 46 x 38 cm Musée d'Orsay, Paris, France
세잔은 자신의 부인을 모델로 마흔네 점의 유화를 그렸으며 많은 뎃상과 수채화를 남겼다. 그중 이 그림이 얼굴을 크게 그린 단순한 구도로 인해 특별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잔은 모든 묘사적인 요소들을 임의적으로 배제시킨 단순화 작업은 근대적인 감성을 부여 했으며 또한 이 초상화의 가장 뛰어난 요소로 평가받고 있다. 이후 이러한 화법은 큰 감동을 받게 된 앙리 마티스는 이 작품을 구입하여 평생 동안 소장했다.
이 작품이 그려질 당시의 세잔 부인, 즉 마리-오르탕스 피케(Maire-Hortense Fiquet)는 38 살 정도의 나이로, 세잔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릴 때 100 이상의 포즈를 요구하더라도 무난하게 따라주던 온순하고 조용한 성품의 여자였다.
세잔느의 결혼생활
세잔보다 열한 살이 어렸던 마리-오르탕스 피케(Maire-Hortense Fiquet)는 1969년 초, 그녀가 열아홉 살 때 세잔을 만나 동거를 했다. 1870년 7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자 세잔은 연인 마리-오르탕스 피케(Maire-Hortense Fiquet)와 함께 마르세이유 인근의 에스타크(L'Estaque)로 떠났다.
1871년에 전쟁이 끝나고 파라로 돌아온 세잔과 마리는 이듬해 아들 폴을 출산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매달 100프랑의 지원을 받고 있던 세잔은 아버지에게는 마리와 폴에 대해 비밀로 했다. 1878년 무렵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화를 내며 일시적으로 지원을 끊었다가, 이후 매달 400프랑의 생활비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녀와의 관계를 하락하지 않아 아버지의 임종 후인, 동거한지 14년 후인 1886년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을 극구 반대한 아버지였지만 400,000프랑이라는 막대한 재산을 유산으로 남겨주어 세잔으로 하여금 평생 경제적인 걱정을 하지 않도록 도움을 줬다.
1890년 이후 세잔은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사건들에 시달리며 당뇨병을 앓기 시작했고 괴팍하고 비사교적 성품으로 인해 더욱 더 작품에 몰두하게 되면서 가족과 친구들에게서도 멀어져 은둔자처럼 지냈다. 그의 작품들은 널리 알려지게 됐지만 실제 만나는 사람은 극소수였던 터라 마치 전설적인 인물처럼 표현되기도 했다. 가족과의 회복을 위해 스위스로 여행을 가면서 노력했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별거에 이르렀다.
Eternal Feminine 1885-1887 Oil on canvas 53 x 43 cm Getty Museum LA CA USA
<올랭피아>의 다른 버전으로 남성이 득실거리는 좌우 공간을 중심으로 중앙에는 여성이 위치하고 있다. 스케치 풍으로 대략 그려진 여성의 인체는 남성의 시선 한 가운데 위치하는 수동적은 대상, 즉 오브제이면서도 남성의 기선을 제압하는 포즈를 취한다. 이는 여성에 대한 세잔의 이중성, 즉 여성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는 세잔 자신의 심리적 초상이기도 하다.
Pine Tree near Aix 1890 Oil on canvas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세잔의 작품은 미술이 선과 색채로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색채로 자연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입증했다. 세잔에 대한 이해는 곧 입체파의 출현을 예견하는 것이다.”
Portrait of Louis-Auguste Cézanne,the Artist's Father 1866 Oil on canvas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세잔은 1882년까지 꾸준히 전람회에 작품을 제출했으나 언제나 낙선만 하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시할 수 있었던 작품은 강하고 굴복할 줄 모르는 남자의 모습을 표현한<화가의 아버지>이다. 작품 속 인물은 신물을 보고 있는데 이는 그의 아버지가 보는 보수적 성향의 신문을 친구 에밀 졸라가 글을 실은 진보적인 신문 에벤느망(L'Evenement)으로 바꾸어놓아 그림의 이미지를 강하게 표현하려 했다.
Card Players 1990-1995 Oil on canvas
그는 중기에 접어들면서 점점 인상파의 그늘을 벗어나서 표현주의적인 경향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자신만을 위한 표현의 세계가 서정적으로 펼쳐졌다. 1890년에서 1895년에 걸쳐 제작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시리즈는 성숙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세잔이 완성한 새로운 미학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자기 자신의 원칙에 충실한 독자적인 미학체계가 출현한 것이다.
Self-Portrait 1873-1876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말년으로 가면서 그림에만 몰두했던 그의 지독한 열정은 세상과 닿지 못하는 무능력함에 ‘자기고립’의 한 수단으로 작용한 면도 없지 않다.
“어떤 놈도 날 건드리진 못해....날 갈고리로 잡아매려고! 절대로 안 돼, 절대로!"
베르나르는 같이 등산하던 세잔느가 넘어지는 것을 잡아주려고 몸에 손을 대자 세잔느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이렇게 외치고 도망쳤다고 한다. 세잔느의 병리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편집적인 성향과 극단적인 대인기피증, 충동적인 성향, 그리고 특히 여성에 대한 두려움은 특정한 성격적인 병리를 암시하기도 한다.
Big Bathers 1900-1905 Oil on canvas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Philadelphia PA USA
The Magdalen or Sorrow 1868-69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The house at Provance 1882-1885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원근법을 파괴하는 것은 세잔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물체를 여러 각도에서 동시에 보여 주려는 목적, 혹은 관람자가 화폭을 바라보는 시각의 높낮이를 조절하려는 목적 이상의 의미를 갖는 혁명이었다. 그는 이 같은 원근법의 파괴를 통해 자유로운 공간 구성을 창출해낼 수 있었고, 바로 이것이 후대의 입체파 화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알렌 리파(미시건 주립 대 교수)-
20세가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폴 세잔은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과 더불어 후기 인상주의 대표젹인 작가이다. 고흐와 고갱이 표현주의와 상징주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작가들이라면 세잔은 입체주의와 대상의 객관적 진실을 표현하려는 현대미학의 뿌리를 제시하였고 인상주의 이후 많은 젊은 작가들에게 새로운 실험의 장을 마련해준 작가이다. 피카소를 중심으로 한 입체파의 전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Still Life with a Skull 1895-1900. Oil on canvas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Philadelphia PA USA
Card Players 1890-1892 Oil on canvas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Philadelphia PA USA
“세잔은 사건에 깊이 생각하지 않은 붓질을 단 한 획도 한 적이 없다.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의 눈을 시원하게 하는 절묘한 색채감으로 사물의 본질을 구성하는 색채의 마술사였다.”
-에밀 베르나르, <폴 세잔에 대한 회상>에서 1921
세잔은 정물화 뿐 아니라 맑은 날이면 화구를 메고 풍경을 그리려 나갔다. 고향인 액상 프로방스에는 생 빅투아르라는 큰 산이 있는데 나무가 거의 자라지 않는 바위가 들어난 민둥산이다. 이곳은 세잔느의 마음의 산이고 외로운 그를 감싸 안아 주었던 산으로 그는 그림을 그릴 때는 늘 몇 날 며칠 아니 몇 달씩 걸려서 그림을 탐구했다. 생 빅투아르 산을 60여점의 작품으로 남긴 세잔느이다.
이런 그의 끈질긴 탐구는 인상주의의 순간적인 것을 그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육중한 생 빅투아르 산은 본질을 그리려던 세잔느에게는 매우 이상적인 주제였다. 색채 역시 풍경의 모습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이제 거의 상징적인 목적을 갖는다. 이를 통해 세잔은 자연의 무게와 영원성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곳에서 세잔느가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리곤 하던 곳이다. 자연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관광객을 위해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아 곳에서 바라본 생 빅투아르 산이 바로 위 사진의 전경이다.
Mount Sainte-Victoire 1904-1906 Oil on canvas Philadelphia Museum of Art Philadelphia PA USA
세잔느는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이 산을 20년이 넘게, 특히 그의 말년에 이 산을 끊임없이 그렸다.
“ 생 빅투아르는 내 안에서 자기 자신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며, 나 자신은 생 빅투아르의 의식이다.” -폴 세잔느-
후기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명인 폴 세잔은 일생동안 사물의 본질을 화복에 담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가 화폭에 담으려는 본질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다 눈에 보이는 존재를 부여해 놓음을 의미했다. 즉 세잔은 자신의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서 사물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연에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가의 의도가 잘 나타난 작품이 바로 <생 빅투아르 산>이다.
Temptation of St. Anthony 1875 Oil on canvas Musee d'Orsay Paris France
이 그림 <성 안토니오의 유혹>에서 여성은 팜므 파탈로 남성을 파멸시키는 퇴폐적인 존재로 표현했다. 그는 이러한 초기 작품에서는 자극적인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화풍과 색조를 과감하게 등장시키며 블랙 색조로 화면을 전반적으로 어둡게 처리했다.
Still Life with Apples and Oranges 1895-1900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역사상 유명한 사과가 셋 있는데, 첫째가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가 뉴턴의 사과이며, 셋째가 세잔의 사과이다. 평범한 화가의 사과는 먹고 싶지만 세잔의 사과는 마음에 말을 건넨다.”
이 작품은 세잔의 정물화 가운데 가장 화려함을 자랑하는 작품 중 하나로, 정물들에서 발산되는 풍성함과 다채로움을 매우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관계 사이의 화음을 포착 하는 것”
액상 프로방스에서 세잔은 정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연을 통해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으로 다시 나아갈 것.”이라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처럼 그에게 사과와 복숭아는 단순한 과일의 차원을 넘어서서 감정을 느끼고 정서를 발산하는 살아있는 생명체이기도 했다. 세잔은 복숭아와 사과가 자라나는 동안 흠뻑 머금었을 햇살과 이슬방울까지도 몽땅 재현하고자 노력했다.
이 그림에서 보듯이 구도적인 면에서 두드러지는데 과일을 담은 접시, 그릇, 포트 등의 시점이 각기 다르다. 세잔은 사물이 갖는 실제적이고 전통적인 명암이나 색채, 또한 원근법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폭 위에 나타나는 이 소재들은 실재감과 완벽한 형태감을 자랑한다. 이는 입체주의를 비롯해 회화의 발전을 예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고, 세잔을 20세기 회화의 선구자로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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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부의 액상 프로방스에서 태어난 세잔은 은행가였던 아버지(Louis-Auguste Cezanne) 덕에 평생을 풍요롭게 지낼 수 있었다. 10살이 되던 무렵 세인트 조셉 학교에서 그림을 배운 세잔은 14살에는 부르봉 학교 (College Boubon, 현재 College Mignet)에 들어갔고 여기서 소설가 에밀 졸라를 만나게 된다.
은행가였던 아버지(Louis-Auguste Cezanne)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잔을 낳아 여유로운 삶은 누렸지만 주위의 모든 이웃과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고 무시당하여 그 수모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잔에게 법과대학으로 갈 것을 강요했다. 세잔도 마찬가지로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냉대의 눈길을 받으며 자란 우울한 유년시절이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액상 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도 드로잉 수업을 계속 받아온 세잔은 1861년에 그림공부를 위해 파리로 떠나게 된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지지와 이미 파리에 설고 있던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기교가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한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 출품하는 그림마다 갖은 혹평 속에 ‘낙선’의 고통이 그를 괴롭힌 것이다.
그의 그림이 중, 후반에 들어선 시기, 즉1889년과 1900년의 전시회 참여 이후, 마침내 여러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며 젊은 미술가들은 세잔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가 56세 되던 해인 1895년부터는 생 빅투아르 산의 오두막집을 빌려 다양한 그림을 그려 나갔는데 이시기의 작품들은 입체파 양식에까지 많은 영향을 준다. 또한 같은 해 파리에서 화상 볼라르(Ambroise Bollard)의 갤러리에서 생애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150여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되었고 인상주의 특성을 가졌으면서도 지적이고 야성미 넘치는 작품을 그려낸 세잔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 죽기로 맹세하였다.”
오랜 당뇨병이 악화된 세잔은 그의 평소의 말처럼 그는 1906년 10월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소나기를 만나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발견 되었다. 세잔을 발견된 후 며칠 뒤인 심한 독감과 폐렴에 걸려 1906년 10월에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여 그의 고향 엑상프로방스에 묻혔다. 즉은 다음 해, 그의 작품들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람회가 파리의 가을 살롱 전에서 열려 많은 찬사를 받았다.
세잔느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렇게 될 때까지는 친구들의 경멸과 동시대인들뿐만이 아닌 동료 화가들의 무지 등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이해받지 못한 채 자신의 길을 묵묵히 살다간 한 고독한 영혼의 초상이다. 비평가들의 냉대에 좌절했던 젊은 시절, 그와 중학교 동창이며 30년 지기의 소중한 친구인 당시 잘 나가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쓴 소설 「작품」에 나오는 무능한 화가 클로드의 모델로 자신을 이용했다며 분개하는 세잔느. “예술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예술에 집착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다네.“ 졸라의 이 말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겨 그 후로 죽을 때까지 세상과 인간을 등지며 살게 만들었다.
세잔은 오로지 그림 속에 자신의 삶을 순교시켰다. 불멸의 회화적 소우주를 창조한 세잔느의 고단함과 격렬함을 함축한 삶의 만년. 만년에 보이는 세잔의 회화는 이전보다 더 웅대하고 자유로운 호흡을 지니게 된다. 화면 구성의 기본 뼈대는 항상 고전적인 질서와 균형을 두되, 대담한 형태의 왜곡이 나타나며 그 균형은 때로는 우주적이랄 수도 있는 자연의 리듬 속에 용해되고 있다.
세잔느가 실제 생활에서 보여주었던 괴팍함이나 변덕스러움, 소심함, 대인 기피증 같은 염인 증들도 그 자신의 그림에 대한 외골수 적인 열정의 반증에 다름 아니다. 가정도 등진 채, 자기고립으로 차단한 세상 속에서 그의 삶은 오로지 그림뿐이었다. 오로지 그림만이 그가 살 수 있는 외길이었다.
스승인 세잔이 죽은 지 십오 년 뒤 다시 엑상프로방스를 찾아온 저자 베르나르의 감회를 서술한 마지막 부분이 특히 감동적으로 세잔의 삶이 보인다.
“나도 그처럼 세잔느의 체온을 느끼며 언덕을 오르고 싶다. 남프랑스의 따뜻한 햇살을 듬뿍 받고 걸으며
“산다는 건 끔찍한 일이야”
라고 중얼거려야 했던 인생의 모순을 껴안고 싶다.”
그렇듯 세잔의 말년 삶은 비참하도록 외롭고 힘들었다.
그에게 향한 찬란한 영광의 이면에 깊게 그늘진 그의 숨은 삶에 시간이 갈수록 가슴이 뻐근해 졌다. 그의 찬란한 영광의 빛은 세상을 등지고 혼자 돌아앉아 있어야 했던 웅크린 고통이 가져다 준 결실인가! 고통스런 삶의 모순이 안겨 준 치열했던 열정의 소산인가!
세상에 큰 빛으로 남은 위대한 세잔느. 그의 아프고 슬픈 영혼에 그를 껴안는 나의 따뜻한 시선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싶다.
따스한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은 이토록 순수하고 아름다운 그의 모습에 그런 어두운 삶이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반 고흐의 <밤의 카페>로 가는 아를의 노변에서 반 고흐를 그리워하는 듯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있다.
지난 해 같은 곳을 가서 허탈하게도 거리에 세워진 세잔느 동상을 본 것이 전부였다. 얼마나 기대를 했었는데... 그래서 다시 찾은 액상 프로방스!
드디어 세잔느를 만났다. 얼마나 반가웠으랴!
바라던 그의 화실을 가게 된 것이다. 가슴 뛰는 마음이 먼저 앞서 기를 쓰면 빠르게 걷는다는 내 걸음걸이가 왜 이리도 느린지 답답하기만 했다. 머리가 먼저 앞서 앞으로 내지르듯 걸었던 기억이다.^^ 기억이 새로워 혼자 웃으며 그때의 설레임이 새로워 가슴이 또 뛴다.
목적한 것을 이루었을 때의 그 희열,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뛰는 맥박, 심장의 고동! 세잔느가 내 가슴에 들어와 힘차게 고동 쳤다.
떠돌며 노래하며...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언제나 가슴이 먼저 뛰곤 한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나를 향해 열려 있는 탁 트인 미지의 세상을 향하는 걸음마다 꿈이 생명처럼 살아서 춤을 춘다. 나의 힘찬 발걸음에 온 대지가 살아서 노래를 한다.
이름도 생소하고 꿈만 같았던 소국들. 어릴 적 읽었던 ‘걸리버의 여행기’라고나 할까, 마치 거인이 된 양 조그만 나라의 오묘함을 요리조리 신기하고 놀라운 경이로운 시선으로 드려다 본 기분! 아직도 생생한 그 감동에 환한 웃음과 함께 가슴이 따뜻해진다.
아드리아 해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온 사람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나라, 유럽에서 3번째로 작은 나라로 200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산 마리노(San Marino) 공화국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아드리아 해안중북부 쯤의 티타노 산 정상에 콕! 찍혀 오똑 서있는 나라, 울릉도보다도 적은 사방이 60㎢의 걸어서도 얼마 안 되는 나라다. 인구가 고작 2만7천 명에다 가파른 타타노 산(Titano Mt 748m) 바위 절벽위에 요새 같은 성을 쌓아 주변의 침략을 막아오며 지금까지 이어 내려온 오랜 역사의, 조그맣지만 옛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며 관광수입으로 살아가는 나라였다. 면세지역이라 인근 나라에서 쇼핑객도 관광객도 대단했다. 때마침 그들을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중세의 날 축제’기간이라 관광객도 그 국민들도 모두가 하나같이 중세시대에서 즐거웠다. 운 좋게도 닷새 동안 중세의 향연이 펼쳐지는 때 내가 간 것이다. 언제나 운이 따라주는 나, 감사하지 아니하랴!
총 3개의 요새가 있는데 왼편부터 첫 번 째가 과이타(Guaita), 두 번 째가 체스타(Cesta), 세변째는 몬탈레(Montale) 요새이다.
이태리의 한 한적한 바닷가 주변의 중세 시대의 시골 마음들, 고작 몇 2,3백 명의 마을 주민으로 집집마다 말끔히 씻은 빨래들이 햇살 속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던 곳, 과거로 회귀한 것 같았던 자연이 그대로 살아있는...가난하지만 평화롭던 마을 들이었다.
이태리 시골사람들에 끼어서 기차로 한 정거장을 가서 그림 같은 시골마을 해안 길을 걷다 또 기차를 타고 다음마을로..바다를 끼고 달리던 기차 안에서의 그 서민적인 낭만 또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구멍가게에서 손짓발짓으로 무화과를 겨우 사서 마을길을 걸으며 먹던 기억도...^^
친퀘테레(다섯개의 땅이라는 의미)의 몬테로소 알 마레, 베르나치, 코르닐리아, 마나롤라, 리오마조레,, 그냥 꿈만 같았다. 내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
안도라(Andorra) 공화국이다!
유럽에서 여섯 번째의 작은 나라다. 피레네 산맥의 남쪽 사면 사이에 있으며,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겨우 끼어있는.. 일부러 찾지 않으면 전혀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수도 안도라 라 베야(Andorra la Vella)는 해발 1023m에 위치한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도다. 더구나 유럽에서 가장 높은 해발 1409m의 고지의 깊은 계곡에 숨은 듯 위치한 적은 그림 같은 예쁜 나라, 도시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22000의 순수 안도라 인구에 사방 486㎢의 서울의 2/3쯤의 파묻히듯 숨어있는(?) 나라였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와 비슷한 카탈로니아어인데,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또한 흔히 쓰인다니! 교육방식마저 인도라식, 프랑스식, 스페인식의 세 가지 시스템이 있는데, 언어 또한 각기 다르게 가르친다고 하며 어느 학교든 부모 자율의사에 맡겨서 선택하도록 되어있다고 한다. 이 조그만 나라에서 어쩌면 그리도 다양한지..!
‘면세’지역이라 좋다는 세상만물이 다 모여 있는 쇼핑천국이기도 하고 빤짝빤짝 빛나는 조약돌을 보는 것만 같이 알뜰한 부자다, GDP가 3만불이라니..! 겨울의 스키 씨즌(9월~5월)과 여름이면 하이킹하기에도 최적의 나라로 매년 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는다고 하는 관광 사업으로 살림을 꾸리는 나라, 모든 호텔이며 레저 시설들이 ‘최고’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마냥 흐뭇하고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그런 나라였다. 다시 찾고 싶은...
아낌없이 제공되던 향긋하던 붉은 와인, 빳빳하게 다려 접은 흰 냅킨, 금테를 우아하게 두른 하얀 쟁반 양옆으로 나란히 줄지어 놓인 반짝이는 은수저 셑트,.. 내가 좋아하는 티라미수로 디저트까지 완벽했던 정식 디너의 만찬이 잊혀지지 않는다.^^
리히테슈타인(Liechtenstein)!
이런 나라도 있다. 작은 땅, 큰 기쁨의 '신비의 小國'이다. 인구 3만5천명의 서울의 1/4정도의 작은 마을 같은 나라이지만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인 리히텐슈타인. ‘작지만 강하다’ 리히텐슈타인만큼 이 말에 꼭 들어맞는 나라도 없을 것 같다. 남북 거리는 25km, 동서로는 6km의 알프스에 둘러싸이고 오스트리아와 스위스사이에 겨우 끼어있는.. 관할권마저 두 나라가 가진 유럽에서 네 번 째 소국이고 세계에서는 6번째 소국이란다. 도로바닥에 크게 우표그림으로 장식되고 우표가 국가수입의 1/3을 차지하는 나라,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버스로 5분이면 그 나라 수도인 파두츠 전체(^^)를 볼 수 있었는데 거리마다 말끔히 물에 씻어 내린 듯 깨끗하고 오밀조밀 아름다웠다.
옛 고풍의 건축물들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멋진 현대식 빌딩들, 특히 그 사이마다 세워진 조각품들이 나를 설레게 했다. ‘행복한 눈물’로 유명한 팝 아티스트 리히텐슈타인의 거대한 조각품 ‘Z'가 문화거리에 위풍 당당히 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뿐이랴! 몇 해 전 우리나라 덕수궁 미술관에서도 전시회를 가졌던 콜롬비아 화가 보테로! 지난달 삼성동 무역센터에서 열렸던 ‘KIAF(국제 미술 아트페어)’에서도 반갑게 보았던... 정치가, 유명인 등 사람들을 유머. 아이러니, 사회적인 비판의 시각을 풍자적으로 비틀어서 과장되어 표현하는 그의 화풍처럼 거대하고 뚱뚱한 벗은 여인이 여기까지 와서 널찍하게 자리 잡고 누워있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멋진 조각품들로 빛나고 구석구석 삶의 여유가 묻어나는 최고의 부국이라는 나라, 실업, 빈부격차, 범죄 없는 3無의 나라, 리히텐슈타인. 국제 특허출원 1000건이 넘고 1인당 국내 총생산은 약 12만 달러로 세계 최고 수준이고 국민 소득은 5만 달러의 부국이다. 거기에다 군대를 보유하지 않고 국민은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없다! 살기 좋은 나라로 선정되는 언제나 1,2위를 다투는 복지국가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리히텐슈타인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았다.
일일이 다 기억은 못하지만 그래서 더 아쉬운... 거리의 조각품들이 그리움처럼 설레임으로 내 가슴에 그려진다.
Rernando Botero 약 130 x 330 cm 정도의 큰 조각이다.
Woman in the mirror 1993 Mixed media 124 x 92.5 cm
풀어내도 끝이 없는 추억들, 아직도 많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내가 여길 오리라곤 꿈에도 상상을 못한 일이다! 5,6년 전쯤이었을까, 이 ‘바스크’라는 곳을 알게 된 게... 인터넷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가수 베니토 럿순디(Benito Lertxundi)! 발음하기도 어려운.. 그의 노래가 너무 좋아 수없이 다운 받아 매일을 듣고 있노라니 너무도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궁금했다. 하나씩 알게 된 것이 바로 그가 태어난 곳. 이 바스크지방이다. 노랫말이 스페인 어도 아니고...생소하기만 한 그의 노래들, 그중에서도 ‘Baldorba’는 지금도 변함없는 내 고향만 같은 노래다. 지난 옛 시절의 고향을 그리는 듯 가슴에 가만히 스며드는 부드러운 노래. 바스크는 어디쯤에 있을까, ‘Baldorba’는 또 무슨 뜻일까...끝없는 궁금 속에서 감상하던...
MP3를 꼽고 버스에 흔들리며 그 꿈에 그리던 바스크를 달리고 있는데 조그만 갈색 도로 표지판에 ‘Baldorba’가 내 눈에 갑자기 확대되어 들어오는가 싶더니 내 옆을 휘익! 스치고 지나갔다! 아! 이 전율하는 기쁨! 순간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은 환희였다. 내 이 멀리까지 와서 이런 기쁨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가슴이 마구 후둘 후둘 떨리며 고동 쳤다. 이 기쁨을 대체 어느 누가 이해할까! 어느 누가..!^^
조그만 시골마을이랬다! 아무리 살펴도 지도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던 곳. 아마도 내 마음의 고향만큼이나 아름다운 바스크의 한 모퉁이에 있는 ‘나의 살던 고향...꽃 대궐’같은 동네인가 보다. 지금 이순간도 그때의 감동에 가슴이 따뜻하게 전율한다. 혼자만의 행복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바스크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바스크(Vask) 사람이다.“ 프랑스 남부와 접해있는 스페인의 북부 끝, 바스크 지역! 그곳에 스페인 속의 또 다른 스페인이 있다. 민족도 다르고 언어마저 판이한 그들만의 언어, 그리고 독특한 문화를 간직한 땅, 줄기차게 독립을 갈망하는 특별하고 조그만 지방, 그곳 바스크엔 그들만의 색깔과 강한 자부심을 지닌 사람들이 산다. 기쁨에 찬 그 멀고도 낯선 곳, 거기에 더 보태어 바스크 지방의 주도 빌바오에 있는 그 당당하고 웅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구겐하임 미술관(Guggenheim Museum)을 내가 간 것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쓰러져가던 바스크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20세기 중반 이후 찾아든 산업의 위기와 도시의 쇠퇴로 실업률의 증가를 가져왔다. 여기에 고질적인 독립을 위한 테러(ETA '바스크 조국과 자유‘) 문제와 반환경적인 도시 상태는 빌바오 사회 전반의 침체를 가속화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다. 따라서 한때 빌바오의 주요 산업이었던 철강 조선 사업이 사양 산업으로 전락하면서 산업도시의 기능을 상실한 도시에 불과했는데, 이 빌바오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바로 1997년에 개관한 세계에서 4변 째로 문을 연 구겐하임미술관이다.
미국의 유명한 예술품 수집가인 솔로몬 알 구겐하임(Solomon R Guggenheim 1861-1949)의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해 1930년에 설립된 구겐하임 재단의 박물관 중의 하나다. 뉴욕, 베네치아에 이어 빌바오에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이 미술관은 다른 분관보다 더 유명하고 인기를 끌고 있다.
빌바오 시는 당시 유럽 분관 부지를 물색하던 미국 뉴욕 구겐하임 측에 부지와 건축비를 모두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몰락 직전의 산업도시를 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시민들의 반대를 설득하면서 시의 확고한 추진의지 덕분에 유치가 성사될 수 있었다. 현재 빌바오 시는 문화와 예술을 무기로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도시로 거듭났다.
골프채를 만드는 소재라고도 알려진 가장 강하지만 가볍고 내식성도 우수한 티타니움의 조각판들로 이어 붙여, 빛이 주는 각도에 따라 금색, 은색, 분홍색 등..다양한 색상으로 변신하는, 물고기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그 멋진 모습에 얼마나 가슴이 설렜던지! 그 위용! 그 형상!
그 뿐이랴.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년 12월 25일-2010년 5월 31일)의 ‘마망(Mamang)’이다, 리움 미술관에도 있는... 그 거대한 왕거미가 개미만한 나(^^)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지 그 가늘고 긴 다리로 위풍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다. 경이로웠고 훌륭했다. 거미가 이럴 수도 있었다!
Guggenheim Museum & Mamang 유람선이 오가는 네르비온 강을 끼고 있다.
Mamang
프랑스 출신인 그녀는 엄마라는 존재를 거대한 엄마 거미로 표현하였는데 강철로 된 알주머니 안의 알들을 보호하고 있는 <마망>은 공포와 경이로운 모성애를 가진 존재와 가는 다리로 알들을 보호하며 버티고 서있는 완전하지 못한 상청받기 쉬운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언니처럼 가까웠던 가정교사였던 여자와의 불륜관계 맺으면서, 성격 또한 폭력적이고 과격 했던 기억으로 어린 브루주아에게 커다란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 시절에 그녀가 느낀 배신과 아버지에 대한 증오, 어머니에 대한 연민은 부르주아의 예술적 원동력이 되었다.
제프 쿤스(Jeff Koons)다!
우리나라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의 트리니티 가든에 전시되어 있는 풍선 같은 분위기의 하트모양의 <Sacred Heart>으로 유명한 작가다. 화려한 생화들로 전신을 장식한<With Puppy>가 구겐하임 미술관 입구에서 미술관을 지키기나 하듯 집채보다도 큰 빌딩만 하달까! 자그마치 높이 12.4m의 거대한 몸집으로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 쉬이 말라버리는 생화를 바꿔가며 ‘영구전시’라니!
그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내 눈으로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쉽사리 갈 수 없는 그 멀고먼 동경의 땅에서!
마구 뛰는 심장만큼이나 얼마나 뛰며 돌아다녔는지..! 오르고 내리며.., 들며날며 얼마나 숨이 차도록 뛰며 돌아다녔는지..!
온 우주를 품에 안은 듯 꿈꾸며 끝없이 떠도는..이 설레는 마음 온 대지가 살아 일어나서 우렁차게 노래를 했다.
이 세상의 주인은 바로 나인 것을...!
내 안에서 이는 이 싱그러운 생명력. 내 삶의 영원한 빛이기를... 소중한 내 생(生)의 영원한 파동이기를...
2012. 10. 21. 편집 하늘 새
정성을 많이 기울였건만 여전히 마음 같지 않게 미흡하기만 하다. 가슴 뛰던 기억만 가득 앞서서 조금씩 곁들인 탓일까도 싶지만 사진 매수마저 한정되어 있는 공간이라 아쉬운 마음이 많다. 그래도 내가 동경하던 곳들을 다녀왔다는 사실이더 없이 기쁘고 감사하기만 하다.
나에게 주어진 이 감사한 순간들, 푸르고 끝없는 가을 하늘을 우러른다.
온 천리만리를 물들이며 밀려오는 가을빛, 이번 생(生)이 마지막인양 붉게 노을 진 석양이 타는 듯 찬란하다. 오늘, 이 고마운 날이 지나면 내일의 소망의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오르겠지. 새날의 새 기쁨으로 푸른 하늘에서 눈부시게 빛나겠지.
나 또한 맑고 밝은 기운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푸른 하늘 가득한 새 풍경 속에서 새 마음 새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내 소중한 삶, 주어진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산다. 내일 또한 그러하리라!
고운 소망의 내일, 기쁨으로 감사하는 내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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